[에필로그]

 

 

낯선 곳을 헤매는 상처투성이의 나에게.

 

 

 

서른번째 생일,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보자 결심하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름. 영등포의 6평짜리 원룸에 누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종일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여행, 섹스 그리고 책.

 

그리하여 그 서른번째 여름,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를 쓰게 되었습니다.

 

 

 

반성문을 쓰는 심정으로

때로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13개국의 낯선 도시와 13명의 남자들에 관한 이야기.

 

그중에는 정말 사랑했던 남자가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상상 속의 남자도 있습니다.

 

꼭 다시 가고 싶은 도시가 있고,

꿈에서조차 가본 적 없는 도시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방황하던 이십대 때의 내가

만나고, 듣고, 상상했던 나의 이야기입니다.

 

 

 

돌이켜보면 엉망진창에 실수투성이의 날들.

하지만 그렇게 서툴고 방황했기에 더욱 반짝이던 나의 이십대.

아직도 마음 한쪽에선 낯선 곳을 헤매고 있는 상처투성이의 나를

이 글을 쓰며 비로소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여행도 돌아올 곳이 있을 때 완성된다고 생각합니다.

여행도 이야기도 인생도 끝이 있기에 완성이라는 말이 어울리겠지요.

언젠가 그 모든 것의 끝에 섰을 때도

지나온 나의 모든 부족함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무런 후회 없는 시작과도 가은

근사한 끝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3년 초여름. 낯선 침대 위에서, 김얀

 

 

*****************************************

 

 

 

 

 

   2013년 여름, 드디어 작가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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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별다른 목적 없이 쓰는 글

 

 참 오랜만이다. 마감에 쫓겨 쓰는 글이 아니고, 돈을 받아 쓰는 것이 아닌 글은. 사실 요즘 누군가에게 12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꾸준히 메일을 썼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목적은 뚜렷했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여주는 게 과연 가능할 일 일까? 하지만 나는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봤고, 지금은 내가 보여주려고 하고 있다. 물론 그 사람이 내 메일을 통해 내 '마음'을 볼 수 있을지 아니면, 도중에 내가 그만 둘 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진짜 목적 없이 쓰는 글이 있을까? 종일 집에 누워있다가 별다른 목적 없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이 글도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책에서도 읽었지만, 일기를 쓰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내 속마음을 털어 놓는 다거나, 상담을 요청하는 일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남의 속마음을 듣거나, 상담을 해 주는 일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자신의 문제점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그것을 해결하는 법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행하는 게 어렵고 용기가 나지 않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 같다. 잘 쓰려고 쓴 글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막 쏟아내고 나면 어느새 조금 진정이 된다. 그리고 다시 읽어보면 내 생각이나 행동에 문제점이 보이기도 하고. 물론 그것을 바로 고치는 일이야 힘들고, 진짜 원하는 바도 아니지만 어쨌든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것이다.

 

 

 요즘엔 사실 글을 거의 쓰고 있지 않다. 작년이면 아주 기뻐하며 응했을 청탁도 다 거절하고 있다. 원래 쓰던 글도 줄이거나, 중단 한 상태다. 대외적인 거절의 이유는 6월 말에 출간하는 여행 에세이 마감에 집중하기 위해서지만, 사실 별로 쓰고 싶은 생각이 안 든다. 개인적으로는 쓰고 싶은 글이 있지만, 모두 다 개인적인 일에 관한 거라 주제와도 맞지 않을 뿐더러 그런 글로 돈을 받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글 쓰는 사람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하겠지. 어느 순간 남에게 보여주고 평가 받는 글을 쓰다보니 잘 쓰고 싶다는 욕심도 생긴다. 그런데 지금은 그 욕심이 나를 망치고 있다. 예전에는 무병을 앓던 무당처럼 머릿 속에 맴도는 이야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막 쏟아 냈던 것 같다. (야하고 이상한 여행기가 거의 이런 식으로 쓴 글이다.) 그런데 지금은 머릿 속에서 억지로 글과 문장을 지어내고 있다. 이유는 잘 쓰고 싶어서다. 맞춤법과 띄어 쓰기, 깔끔한 문장, 좀 더 멋진 비유는 욕심을 넘어 강박이 되어 버렸다. 혹시라도 이 글을 프로 작가나, 오랫 동안 글을 쓴 사람이 본 다면 ' 뭐, 제대로 시작도 안 한 년이 오바하네.'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여튼 이런 생각까지 해야하는 것도 짜증 난다.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글을 쓰려고 해도 이미 그 방식으로는 계속 글을 쓸 수 없다. 바위 안에 박혀있는 원석 그대로를 다듬지 않고 반지 위에 올릴 수는 없는 것이다. 조금만 다듬으면 더욱 빛날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단순히 나 혼자 쓰고 읽는 일기가 아니라 글을 써서 먹고 살려거든 남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남들이 돈을 주고 살 보석이 되어야 하는 게 당연하다. 

 

 

 주변에 글 쓰는 사람들 몇몇이 충고 해 주기로는 이럴 때에도 일단 써야 한다고 했다. 글쓰기는 무조건 책상 앞에 앉아 버티는 일이라는 이야길 자주 들었다. 신문사나 잡지사마다 비용 문제 때문에 외부 칼럼니스트를 줄이고 있기 때문에 지금 있는 것들도 놓아 버리면 결국 후회하게 될 거라고도 했다. 이 바닥은 결국 오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는 말도 들었다.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가 못 하겠다는 거다. 조금 기다려 보자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매일 쓰고 있는 메일이 답을 기다리고서 하는 일이 아니 듯 정말 조용히 기다려 볼 참이다. 시간이 지나면 후회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후회는 지금 생각하는 게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용히 기다리는 일이다.

 

 

 2. 요즘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들

 

 트위터는 정말 생각을 빼앗아 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줄여야 하는 것은 맞다. 날씨가 풀리면 근처 횟집 수족관 앞에서 물고기들을 관찰하고, 그것을 써서 글쓰기 연습을 해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나는 단순히 예쁘고 깔끔한 문장을 좋아해서 그 점에 맞춰 글을 쓰고 싶다. 쓰다보면 문장이 자꾸 길어지는 것도 짜증난다. 어느 분의 추천으로 안정효씨가 쓴 '글쓰기 만보'라는 책으로 문장 연습을 하고 있는데, 하다보니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기본적인 것들에 주의하면서 나만의 문장을 쓰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하라고 추천해 주신 것이겠지만)

 

 

 6월 말에 책이 나와서 히트를 친다고 해도 바로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이 몇 권 팔렸다고 돈이 바로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신인 작가가 책 한 권 내서 평생 먹고 사는 일은 한국에서는 불가능 인 것 같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서 화가 난다. 물론 음악하는 사람들은 음악을 듣지 않는 사람에 화가 나겠지. 사실 나도 음악을 잘 듣지 않는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을 못하는 타입이라 음악 감상 보단 늘 책 읽기를 선택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사람은 이기적인가 보다.  

 

 요시다 슈이치 소설을 몇 권 읽고 싶고, 박범신 선생님이 현재 연재 중이 소설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 한지 1년 되면 호주를 가서 2년 정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그런데 이건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다) 조금 더 비워내기로 다짐도 한다. 연습. 연습. 뭔가 열심히 연습하는 타입이 아니지만,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연습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기도. 앞으로 벌어질 것들에 대해 미리 생각도 해보고, 뭔가를 소망하는 기도. 그런 기도를 하며 지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게 집중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겨울은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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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일 아침, 인천 국제 공항

 

 

통장 잔고에 100만원 쯤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공항 ATM에서 잔고를 확인하니 겨우 20만원 남짓. 출국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는 수 없이 엄마에게 전화. 늘 그렇듯이 엄마는 "널 믿는다." 라는 말을 남겼다. 몇 분 뒤 통장에는 100만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6월 20일 오후 2시 창이 공항

 


보리가 택시를 타라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택시비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아서 사람들에게 물어 지하철을 이용했다. 어릴 때부터 택시는 아주 급할 때만 타야한다는 엄마, 아빠의 말 때문에 아직까지도 택시를 타는 일은 1년에 손을 꼽아야 한다. (택시 기사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당산 - 인천 공항 리무진 버스 9000(원)
싱가폴 창이공항 - Chinese garden ㅡMRT 3.1 (싱가폴 $)



 



6월 23일 탄 종 파카 스테이션



 

 

 

 

 

탄 종 파가. 특별한 볼거리는 없어도 그냥 건물들의 분위기가 좋았고, 작은 문구점을 발견하곤 노트도 샀다. 정처 없이 그냥 걷다가 우연히 중국식 사원과 그 옆의 이슬람식 사원을 발견해 차례대로 가서 나만의 방식으로 기도도 했다. 가족들의 건강을, 친구들의 행복을 그리고 무엇보다 철 없는 나의 앞날에 축복을.



탄종파가역. 문구점 노트 2.4 ($)
래플스 플레이스역. 야쿤카야토스트 set 4.5 ($)


 

6월 24일 멀라이언 파크

 

 





 

 



플러톤 호텔 앞을 어슬렁 거리고 있을 때, 그들은 그 앞의 브릿지를 건너고 있었다. "사진 좀 찍어줘." 로 시작해서 이 날 하루를 함께 했던 착한 독일 청년들. (좌- 데니스, 우- 알페어) 내일 함께 센토사 섬에 가기로 했는데, 과연 만날 수 있을까?



 

6월 25일 센토사 섬

 

 







 

 

데니스와 알페어와 센토사 섬 관광. 센토사섬에는 3개의 인공 해변이 있는데, 우리는 3곳 모두에서 수영을 했다. 덕분에 콧등과 몸이 빨갛게 타버렸다. 아직도 등이 따끔따끔. 그들은 내일 태국 남부를 시작으로, 동남아시아 4개국 여행을 할거라고 했다. 나를 비롯 모든 여행자들에게 행운이 함께 하길.

 




6월 27일 파크 오아시스 (보리네 집)

 

 



 



 

 

"아직 싱가포르 입니다. 내일 말레이시아로 갔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 올 거예요. 별 기대없이 왔던 싱가포르의 미력에 빠져서 좀 길게 있게 되었어요. 덕분에 모든 계획은 다 틀어졌지만.

사는게 다 그렇죠 뭐, 뭐든 생각대로 되지 않고, 야무지게 짜 놓은 계획은 틀어지기 쉽상이고, 언제든 변할 수 있는게 인생이잖아요. 나를 사랑한다고 하던 당신이 이제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된 그 마음처럼요."


 



6월 28일 말라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서 말라카까지는 버스로 4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말레이시아 여행은 인도네시아 마나도에서 일하고 있던 홍이와 함께여서 여러모로 편했다.  

 


 



6월 29일 아침, 말레이시아 미용실

 

 

 

 



 

 

 

왜 그랬을까? 도쿄의 오모테산도도 아니고 긴자도 아닌 이 말레이시아 시골 미용실에 나는 왜 앉아 있었을까? 심지어 파마 비용도 전혀 싸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한국 미용실보다도 비쌌다.) 그냥 심심한 동네라 뭔가 재미있는 일 없을까? 해서 미용실에 얼굴을 내밀어버린 게 잘못이었다. 방값의 5배나 되는 돈을 내는 내 모습을 보고 홍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몇 시간 뒤 다 풀려버린 머리카락을 보고는 어이 없는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6월 29일 저녁, 길거리 식당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에 비하면 물가가 아주 저렴하다. 낮에는 300원짜리 아주아주 낡은 시내버스를 타고 말라카 시내구경을 했고, 저녁에는 길거리 인도식당에서 현지인들처럼 손으로 저녁을 먹었다. 음료수까지 이렇게 푸짐하게 먹어도 1인당 3000원. 겁없이 현지 미용실에 들어가서 파마를 한 것만 제외하면 아주 완벽한 하루였는데. 흠.

 


6월 30일 쿠알라룸푸르

 


 



 

 

 

 

 

 페트로나스 트윈 타워 (쾰른 성당과 닮았어)

이제 야간 버스를 타고 다시 싱가포르로 간다.

 

 

 

6월 30일  밤의 고속도로

 

 

자정에 출발한 야간 버스. 쿠알라룸푸르에서 싱가포르로 가는 밤의 고속도로.

버스 안에는 작은 바퀴벌레들이 심심찮게 등장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어두운 창 밖을 보다가 문득 여기가 지금 서울에서 울산으로 가는 고속도로인지

내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일 아침이면 다시 치과로 출근을 해야하는 건지

뭔가 뒤죽박죽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은 홍이는 가끔 몸을 뒤척였다.

홍이는 내일 다시 인도네시아로 간다. 나는 어디로 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7월 1일 싱가포르

 

 

 

 

 

싱가포르에서 일상은 느즈막히 일어나선 밍기적밍기적 대다, 쫄래쫄래 아파트 수영장에 가서 태닝하면서 책 보다, 그러다가 더우면 수영하기, 근처 시장에가서 로컬 음식 먹기, 여기저기 동네 기웃거리기.  

이렇게 일주일을 더 보냈다. 그리고 나는 내일 태국으로 간다.

 

 

7월 7일  카오산 로드 (태국)

 

 

 

 

 

 

 

세 번째 태국. '이제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어.' 라며 나는 방콕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이틀 동안 정말 방콕했다. (게스트 하우스 밖을 나가지 않았다.) 혼자 하는 계획 없는 여행이란 정말 좋아. 이틀 동안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전혀 문제 되지 않으니까.

 

 

 

7월 8일 씨엠립 (캄보디아)

 

 

 

 

 

 

오늘은 아침 일찍 부지런을 떨었다. 어제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에게 미니 버스로 저렴하게 캄보디아 국경을 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여행자들과 함께 택시를 타고 씨엡림으로 왔다. 택시에서 3시간 동안 우리는 꾸벅꾸벅 졸았다. 23살 그림을 그린다는 여자 아이와 게스트 하우스 2인실을 함께 쓰기로 했다.

 

1인당 1박에 한화로 4천원. 낡은 에어컨과 낡은 침대. 

 

그런데 양치를 하려고 들어간 샤워실에 녹슨물이 나온다. 우리는 결국 생수로 양치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다 침실 벽에 붙어있는 작은 도마뱀을 발견하고는 마구 웃었다.

 

 

7월 9일 앙코르 와트

 

 

 

 

 

내리쬐는 태양볕에 땀이 주르륵, 결국 머리를 질끈 묶고. 보면 볼수록,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놀라웠던 앙코르 와트. 건축물이야 사진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때 그 곳의 공기, 그때 그 곳의 태양볕, 그때 그 곳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은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7월 10일

 

 

 

 

게스트 하우스 근처 작은 호텔의 수영장을 발견했다. 2달러짜리 음료수를 시키면 수영장을 종일 이용할 수 있었다.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가, 태닝 오일을 바르고 썬탠을 하기도 했다가, 책을 읽기도 하고, 호텔 wifi를 이용해서 한국의 친구들과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스콜 현상을 만나면 비를 비해, 저 오두막처럼 생긴 레스토랑으로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거다. 소나기는 잠시 뿐, 다시 쨍쨍 내리쬐는 태양 볕. 서늘했다가 다시 따뜻했다가, 또 금세 뜨거워져버리는 수영장의 날씨.

 

변덕쟁이 날씨에도 나는 그곳에서 분명 행복했었다.

 

 

 

7. 11 톤레삽 호수

 

 

 

 

 

 

오후에는 톤레삽 호수에서 낡은 배를 타고 강으로 녹아 흐르는 태양을 보았다. 내일은 다시 태국으로 간다. 꼬창이라는 섬에서 며칠을 보낸 뒤 다시 서울로 갈 것이다.  

 

 

7월 12 Co Chang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 지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선 나는 이제 더 이상 보통 사람(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을 살기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직장을 혹은 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것과 한 남자와 연애 혹은 중매 후 어느 정도 기간을 거친 후 결혼, 임신과 양육, 노후 등등의 단어와는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아버린 것이다. 아무 생각없이 시작한 여행에서 본의 아니게 나를 찾는 여행이 되어 버렸다. 사실 열 네시간이라는 이동 시간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꾸준히 살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때는 죽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씨엠립 - 캄보디아 태국 국경 지역 - 방콕 - 뜨랏 - 꼬창

 

 

총 열 네시간을 도로와 바다에 버렸다. 생각도 같이 버려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깜깜한 밤에 도착한 꼬창에서 썽태우(오토바이에 수레가 매달려 있는 미니 택시같은 것)를 타고 번화가로 갔다. 길도 썽태우도 몸도 마음도 몹시 흔들렸던 것 같다.

 

다음날 꼬창에서 난생 처음으로 서핑을 했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것이 있다니! 제일 처음 야간 산행을 하고 정상에서 야경을 봤던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역시 죽지 않길 잘했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7. 16 다시 방콕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 날. 호텔 방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1박에 30만원이 넘는 방콕 실롬의 일급 호텔. 예전에 같은 직장 동료들이 이곳으로 여름 휴가를 왔다고 했다. 그녀들은 지금 막 맛사지 샵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함께 직장에 다닐 때는 나도 같이 풍족한 휴가를 보냈었는데,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당장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막막하다. 여행과 함께 나의 여유는 끝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육천원짜리 게스트하우스에서 여덟명과 한 방을 쓰고, 오늘 아침에도 에어컨도 없는 덥고 낡은 식당에 앉아 천원짜리 쌀국수로 아침겸점심을 해결했다. 숙소가 있던 람부뜨리로드에서 이 호텔까지 오는 길 역시도 교통비가 가장 저렴한 방법을 물어물어 700원짜리 수상버스를 탔다. 이제 주머니에는 공항으로 갈 지하철비 밖에 없다.

하루 종일 먹은 거라고는 천원짜리 쌀국수가 다라서 그런지 손이 덜덜 떨린다. 호텔 방 안에는 내려 먹는 커피가 무료라 평소에는 먹지도 않는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다.

일단 따뜻한 욕조 목욕을 하기로 한다. 그리고 배낭 제일 깊숙한 곳에 넣어뒀던 미니 드레스를 입을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는 한달만에 처음으로 진한 메이크업을 했고, 혹시나 몰라 가져왔다가 한번도 신지 않았던 굽이 높은 샌들을 신었다.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호텔 바로 내려갔다.

 

오늘 밤은 한달 간 여행의 마지막 밤.

 

나는 조금 즐거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슬플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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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쓴 게 얼마만인가.

(사실 지금도 가볍지 않아)

써야하는 글은 많은데 당장 들어오는 돈은 없고.

돈이 없으니 온 신경이 당장 다음 달은 어떻게 살까?

하루에도 몇 번씩 아르바이트 구인사이트를 뒤지고,

이거만 풀리면, 이 일만 풀리면, 내가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하는 생각.

도착점이 눈 앞에 있다는 건 아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주저 앉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

서랍 안에는 밀린 고지서.

하루에도 몇 번씩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쓸 수 있어' 라고 스스로 다짐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결국 내가 이렇게 쓰지 않으면.

 

하지만 결국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것.

오늘도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나는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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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너는 나를 정말 좋아해?"


섹스를 마치고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응"


남자는 침대에 앉은 채로 조심스레 콘돔을 빼며 말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물티슈를 집어 남자에게 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나를 왜 좋아해?"


남자는 그제서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러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왜 어째서 좋아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힘들지. 뭐 이를테면 애정이나 사랑은 이성적인 판단에서 내려진 결과물이 아니니까."


나는 남자의 팔을 댕겨 베고는 나란히 누웠다.


"그래. 당연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 하지만 뭐든 일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는거야. 사랑이 감성적인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감성적으로 표현을 해봐. 네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그러자 남자는 미간의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으로 돌아 누웠다.


"아니, 여자들은 꼭 그러더라. 그럼 너는 나를 왜 좋아하고 사랑해? 감성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니가 먼저 얘기해 봐."


나는 한손으론 남자의 가슴께에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너 여자들한테 별로 인기 없었지? 여자들은 이성보단 감성이지.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무슨 이해가 필요한 말이 아니야. 하루키 소설이 왜 여자한테 인기 있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좋아? 라고 묻는 여자한테 봄날의 곰만큼 좋다고 말을 하잖아. 봄날의 곰만큼이 어느 정도냐면 봄날의 들판을 여자가 걷고 있을때 갑자기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와선 인사하고 그런 다음 새끼곰을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거라고 말해주는거야. 뭔가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겠지만, 원래 여자들은 뜬구름 잡는 소릴 듣고 싶어하는 거야. 특히나 이렇게 남자랑 섹스하고 누워있을 때엔."

 

그러자 남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반색하고는 나에게 묻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현실 속의 곰은 너네가 생각하는 그런 곰돌이 푸가 아니야. 아무리 새끼곰이라도 그렇지 곰이랑 언덕을 굴러봐라. 최소 전치 3주겠다."


남자는 뭔가가 불만인지 입을 삐죽대며 지지않고 말한다. 그 모습이 곰돌이 푸 동화책에 빠져있는 여섯살 꼬마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 내가 말해주지. 내가 널 왜 사랑하는 지를"


나는 일부러 더욱 확신에 찬 눈빛을 보여주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봤다. 
남자는 호기심이 이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린다.


"사실 섹스는 약간의 호감가는 상대와 호기심만 있으면 누구와도 재밌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면 이렇게 섹스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는거야. 그래서 잠든 것을 확인하고 먼저 나와 버리거나, 불편한 팔베개를 하고 남자가 잘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벽에 붙어 잠을 자는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너는 처음부터 같이 잠을 자는 게 편했어. 신기한 일이지? 이렇게 나란히 누워있으면 나도 모르게 니 팔을 당겨와서 머리를 베고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싶어지는거야. 겨드랑이에 살짝 베인 땀 냄새에도 상관없이 이렇게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한쪽 다리가 니 허벅지 위로 올라가. 사실 나는 어릴 때 쓰던 내 길다란 쿠션 외에는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무엇에 다리를 올려본 적이 없어. 혼자 자는 게 습관이 됐기 때문에 사람한테는 특히 더 불편했지. 그런데 네 허벅지에 다리는 올리고 나면 한 쪽팔은 또 니 가슴 위로 올려버리게 되는거야. 아마 천장 형광등에 반짝이는 눈이 있어서 내 모습을 본다면 아주아주 웃길 수도 있어. 하지만 니 옆에만 누우면 내 몸은 뭔가 이런 자세가 입력된 것처럼 자동으로 만들어져 버리는거야. 그런 다음 나는 아주아주 단잠. 심지어 어제는 어릴 때처럼 잠자리랑 하늘도 날아다녔어.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고 누가 그랬대. 그치만 이런 잠이라면 죽음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내 말을 듣던 남자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옆으로 돌아누으며 말했다.


"음. 뭐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럼 뭐 내가 뭐 쿠션이라는 거야 뭐야?"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건 아닌 눈치다. 나는 남자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남자의 머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응. 맞아. 너는 쿠션같아. 내가 어릴 때 늘 기대자던 길다란 쿠션이 있었는데, 그 쿠션 같아. 그래서 니가 좋아."


남자는 숨이 막힌다며 고개를 부볐다. 


우리는 웃으며 다시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쿠션을 안았다. 누가 공기 속에 수면제라도 탄 걸까? 나는 다시 남자를 안고 단잠에 빠진다. 오늘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 내일 아침 정말 키가 조금 더 커져 있을지 모르겠다.

 

 



           Istyle24의 패션웹진 sn@pp  - 김얀의 色콤달콤한 연애 www.snapp.co.kr

 

 뒷 이야기 ㅡ snapp은 패션웹진이라 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20-30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자라서 그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쓴다는 게 엄청 부담이었다. (나이대는 나와 같지만 나는 패션이나 유행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연애칼럼이라고 해도 스스로 나의 연애 방식을 추천해줄만 하지도 않다.) 그래서 1회 때는 내 경험으로 재밌고, 쉽게! 라는 컨셉을 잡고 글을 썼는데, 그러고 나니 쓰는 게 재미가 없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가 아니었다. 글을 올려놓고 처음으로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3회 때 부터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쓰자!하고 컨셉을 잡았다. 그러고 나니 금새 글쓰기가 재밌다.(요즘에는 snapp에 쓰는 연애칼럼이 제일 재밌다.) 게다가 매회 별 다른 생각없이 썼는데, 이것들을 모으면 연애 소설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겨레hook 칼럼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글을 완성해서 일러스트를 하는 친구들에게 보내면 그들이 내 글에 맞게 그림을 그려준다. 그런데 최근에 snapp의 글들은 알디(@RDRDRDRDRDRDRD)의 그림을 먼저 받아서 그것을 보고 내가 상상해서 글을 만드는데, 이것도 매우 즐겁다. 한겨레hook의 일러스트레이터 코베(@kovelee)에게도 이 방법으로 해보자고 해야겠다. 

 

 처음 여기저기서 칼럼을 써 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는 그저 기쁘기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것때문에 정작 내가 진짜 쓰고 싶어하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던 적도 있다. 마감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어디가서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던 적도 있었다. 쓰기 싫어서 울면서 키보드 앞에 앉았던 적도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디서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그다지 잘 쓴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사람이 이런 기회를 받았다는 것부터가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마감이라는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매일 잠만 잤을테다. 스스로도 남들보다 조금은 특별한 감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글로 매끄럽게 표현해 내는 것은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와 노력이라는 단어는 재미없지만 이것은 나의 잘난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나는 사실 잘난척을 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어쨌든 돈을 받으며 스스로 공부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평생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장학금을 받는 기분이 든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근데 다음 주에는 또 뭘 어떻게 쓰지?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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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01. 08


 예전엔 눈물이 필요할 때, 눈물이 나와주지 않아서 곤란했던 적이 꽤 있었는데, 2009년이 되자마자 갑작스레 눈물이 많아졌다. 정말로 아무런 이유없이도 그냥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심지어 어제는 언니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얘기를 하다가 그냥 울어버리기도 했다. 




 정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유치원 겨울 방학을 맞은 언니와 그냥 최근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내가 언니에게 이번 방학 기간엔 무엇을 할 계획이냐고 묻고 언니가 대답하던 중이었다. 한번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어서 나는 큰 소리를 내며 울었다. 물론 언니는 당황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신용카드가 정지된 주제에 연습장에서 공을 치고 있자니 어쩐지 내 자신이 한심해졌다. 내 자신이 한심해 지다니......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나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다. 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예전에 치과 코디네이터 교육을 받던 중에, 어느 학자가 개발한 자존감 테스트에서 나는 그 세미나를 듣는 사람 중에 가장 높은 점수가 나왔다. 나는 나 자신을 사랑했고, 물론 지금도 사랑하고 있지만 최근 들어 조금씩 줄어드는 것도 같다. 어차피 자기애(愛)든, 무엇이든 사랑이라는 것은 양이 늘었다가, 줄었다가, 그러다가 완전히 사라져 버리기도 하는 것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한 달 전, (그러니까 작년) 나는 " 사랑이라는 것은 여러 감정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서 나는 언제나 쉽게 지쳐버리고 만다. " 라는 문장을 시작으로 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사실, 그때 만나고 있던 남자에게 싫증을 느껴서 일종의 변명같은 글을 쓰고 있었지만, 다행히 글이 완성 되기 전에 헤어지게 되었고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이건 좀 슬픈 일이지만 한 해, 한 해가 지날 수록 사랑이라는 것은 시간과 감정과 체력의 낭비인 것 같다. 지금 누군가를 죽도록 사랑하고 있는 연인들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냥 나의 개인적인 의견은 그렇다는 것이다.


 *

 전 세계적으로 경기가 너무 안 좋다. 그래서 사람들은 움츠린다. 심적으로든 행동으로든. 고로 나도 따라 움츠려 본다. 예전 같으면 남이야 어떻든 뭔 상관이람 하면서 양 팔을 팔랑팔랑 흔들며 당당하게 걸었을 것도 같은데, 이제는 따라 움츠리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누구보다도 가장 낮게 움츠릴 수도 있을 듯 하다. 정말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들의 투성이다. 


 *


 아직 나의 몸과 머리는 J여고 3학년 2반 야간 자율학습시간 교실에서 꾸벅 꾸벅 졸고 있는데, 어느새 꾸역 꾸역 스물여덟살이라는 나이를 먹어버렸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 없이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무런 신호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더욱 분하고 화가 나는 것이다.




 나는 특별하다고, 나만은 특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그것은 좀 개소리였다. 나는 슈퍼맨도 아니고, 배트맨도 아닌 것이다. 잘 생각해보면 현실에선 배트맨도 슈퍼맨도 찾을 수가 없다. 그들은 오로지 스크린 안에서만 영웅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뭔가 속은 듯한 느낌도 든다.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나? 이러다간 무신론자인 내가 텁썩 종교의 끈을 잡아버릴 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옿은 것인지를 판단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는데도 벌써 이십대 후반으로 넘겨졌다.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나는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도 못했는데. 어느덧, 스물여덟.
 




나의 스물여덟은 이렇게 영문을 알 수 없이 내게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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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무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할 때면 왜 갑자기 콧등이 간지러울까? 고무 장갑을 벗기가 귀찮아서 코를 찡긋찡긋 해보며 참아보지만, 도저히 긁지 않으면 안될만큼 간지러워져서 ' 아이, 씨발. 졸라 귀찮군.' 하며 손에 찰싹 붙어있는 고무장갑을 찢어 버리듯이 벗고나면 거, 참 희안하게도 별로 간지럽지가 않다. ㅡ 이건 진짜 신기한 일이다.




2. 나라에서 인정한 도박을 주식이라고 했던가. 그럼. 소설은? 그렇다면 소설은 철학을 담은 거짓말이다. 누가누가 더 그럴싸한 거짓말을 하느냐. 이것이 문제구나. 오늘도 소설가들은 뭔가 좀 더 완벽한 거짓말을 만들어내느라 골치가 좀 아프겠군. ㅡ 이건 진짜 조금 슬픈 일이다.




3. 밤에는 잠을 자야한다는 말. 특히 밤 10시부터 새벽 2시에 잠을 자야 피부가 고와진다는데, 그런데 어쩌지? 그 시간은 나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활동 시간인데......
분명히 같은 장소인데도, 아침의 공기와 밤의 공기는 다르고, 분명히 같은 노래인데도, 아침에 듣는 노래와 밤에 듣는 노래는 다르게 느껴진다. 창밖은 어둠으로 채워지고, 주위는 어둡게 고요해지고, 내가 사랑하는 리암과 노엘이 노래로 말을 걸어오는데, 어찌 모른척하고 눈을 감고 잠들 수 있으리. 역시 이런 밤은 그냥 잠들기 아까운 시간. ㅡ 이건 진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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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어제 세워둔 오늘의 계획은 아침 일찍 일어나 10시 쯤에 도서관으로 가서 노트북에 글을 잔뜩 써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왠지 목도 칼칼한 것이 편도선이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몸이 으슬으슬 한 것이 감기 몸살 기운이 있는 것도 같아서, 결국 ' 에라, 모르겠다' 하며 이불을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뒤 늦게 일어나 기지개 한번 켜고 꾸역꾸역 점심 밥을 먹고, 다시 드러누워 자기를 반복하다가 정이현의 산문집을 좀 보고있으니, 어느 덧 아빠의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 아, 맙소사. 진작 도서관에 갔다가 아빠가 주무실 때 들어 올 껄.' 하는 후회와 초조함이 오후 서너시의 서해안에 밀려드는 밀물처럼 밀려든다.

 



 자고로 우리 아빠 강상봉씨에겐 일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닌 가축인 것이다.

 

 

 학창 시절엔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으면 눈 나빠진다는 꾸중을 피할 수 없었고, 국문과에 가고 싶다는 나에게 " 예술보단 기술! 사람이면 기술을 배워야지!" 하시며 전문대학의 치기공과를 허락하셨던 그런 아빠였다.

 

 보통 서른이면 시집을 가겠다는 다른 집 딸들과 다르게 " 아빠, 난 이제부터 글을 쓸꺼야! " 하며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여행을 준비하던 서른의 딸은 이런 아빠의 근심, 걱정의 엑기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뭔가 나는 그저 집에서 노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 아빠가 씻고 나오자,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보란 듯 식탁에 놓고는 엄마보다 더 먼저 주방으로 뛰어나가 부리나케 저녁 상을 차렸다. 심지어는 노른자를 깨뜨리지 않고 적절하게 익힌 반숙 계란 프라이도 아빠의 밥 위에 얹어 놓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케찹으로 슬그머니 하트모양의 데코레이션을 그려보았지만 하지만 아빠는 그냥 간장이나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_ - 

 

 아빠의 핸드폰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아빠의 고향 친구분인 듯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이야기는 어른들 전화 통화의 클라이막스라는 자식 자랑 타임이 시작된 듯 했다.

 

 (아니, 왜 중년어른들은 서로 몇 번 본 적도 없는 서로의 자식들 이야기에 통화의 2/3를 소비하는 걸까. 게다가 꼭 그들 집 자녀들은 SKY 출신에 심지어는 또 효녀효자다. 씨발.)

 

 어쨌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모래알을 씹듯 밥알을 씹고 있는데 그 집 자식들 자랑이 다 끝나고, 인사치레로 우리 집 애들의 안부를 물어왔나 보다. 순간, " 어, 뭐 우리 집 애들이야 뭐...." 로 시작하는 아빠의 음성이 가냘프게 떨렸다. 아마도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 나때문에 곤란한 심경이 느껴졌다.

 

 " 뭐 우리 첫째는 (우리 언니 강미나) 여전히 다니는 유치원 잘 다니고 있지, 애가 원체 성실하니깐." 으로 시작 해서 현재 유치원에 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원감 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혹시나 그 분이 못 들었을 까봐 두 번씩이나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통화를 듣고 있던 나와 엄마는 서로 은연 중 긴장하고 있었다.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 막내는 (그러니깐 나) 원래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얼마 전에 잠시(?) 그만 두고 유럽에 전공관련 연수(절대 아님 그냥 두달동안 놀다 온 것이였음.) 를 다녀와서 이제 다시 곧 복직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우리 막내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이든 재취직이 쉽다는 말도 빼먹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셨는지




 " 그래도 우리 집 애들은 착해......"




 착해.... 착해.... 그 뭐냐, 제일 뭐 할말 없을 때 하는 말.... 사람은 착해......

 


 전화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몇 년 전,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조용한 가족" 처럼 조용히 밥을 먹었다. 아무 말도 없이 식사를 하시던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마디 하신다.

 

" 글이고 뭐고, 까불지 말고 그냥 다시 빨리 취직이나 해서 시집이나 가거라. 오늘 뉴스 보니깐 서른 두살 어느 시나리오 여자 작가가 굶어서 죽었다더라." 

 

-_  -

 

 고 최고은 작가의 요절 기사를 보셨나 보다.



 나도 오늘 인터넷 뉴스로 봤었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예술가가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배고픔에 굶주리다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한국이 경제적으론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예술이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인간을 고등高等한 생명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 갔던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지하철에서는, 거지행색의 기타를 맨 사람이 들어와 노래를 부르고 동전을 거둬갔다. 사람들은 박수와 동전을 아끼지 않았다. 꼭 무엇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는 우리나라의 지하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나는 깜짝 놀랐었다.

 

 어느 장르든 어느 계급이든 예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다른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거의 모든 지하철 역마다 길 거리의 음악가들이 있었다. 길거리 어디서든 자유롭게 노래부르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그들을 보며 응원하고 즐기는 시민들이 있다. 어찌보면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행위 예술가들이 있고, 길에서 그림을 그리고 파는 미술가들 천지다.

 

 "아빠! 그건 이 나라가 잘못된 거라구! 이 사회가 문제란 말이야! " 

 

 하며 힘껏 반항 해 보았지만, 아빠는 식탁에 앉아 모이를 먹고 있는 가축의 소리는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괜히 밥에다가 케찹을 뿌려가지고는......' 하며 역정을 내며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가셨다. 나는 무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김에 싼 밥 위에 도라지 무침을 얹으며 생각했다.

 

 

도저히 안되겠군.

그래

드디어 

집을 나가야 될 때가 된거야.

그래

독립을 하자 !







-


2011. 2. 10 의 일기 ,

그리고 한 달 뒤, 진짜 짐을 싸서 서울로.

선릉 친구집에서 한 달 지내고, 당산(영등포 롯데마트 앞)에서 3달을 살다가 밀린 월세 때문에, 사당 나비네 집으로 피신. 결국 지금은 나비와 사당 장미여관에서 살고 있어요. (진짜 여관이 아니고, 나비랑 내가 마광수의 골수팬이라 집이름을 장미여관이라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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