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어제 세워둔 오늘의 계획은 아침 일찍 일어나 10시 쯤에 도서관으로 가서 노트북에 글을 잔뜩 써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보니 왠지 목도 칼칼한 것이 편도선이 부은 것 같기도 하고, 괜히 몸이 으슬으슬 한 것이 감기 몸살 기운이 있는 것도 같아서, 결국 ' 에라, 모르겠다' 하며 이불을 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뒹굴거리고 있었다.

 

 뒤 늦게 일어나 기지개 한번 켜고 꾸역꾸역 점심 밥을 먹고, 다시 드러누워 자기를 반복하다가 정이현의 산문집을 좀 보고있으니, 어느 덧 아빠의 퇴근 시간이 다가왔다.

 

 ' 아, 맙소사. 진작 도서관에 갔다가 아빠가 주무실 때 들어 올 껄.' 하는 후회와 초조함이 오후 서너시의 서해안에 밀려드는 밀물처럼 밀려든다.

 



 자고로 우리 아빠 강상봉씨에겐 일하지 않는 자는 사람이 아닌 가축인 것이다.

 

 

 학창 시절엔 교과서가 아닌 책을 읽으면 눈 나빠진다는 꾸중을 피할 수 없었고, 국문과에 가고 싶다는 나에게 " 예술보단 기술! 사람이면 기술을 배워야지!" 하시며 전문대학의 치기공과를 허락하셨던 그런 아빠였다.

 

 보통 서른이면 시집을 가겠다는 다른 집 딸들과 다르게 " 아빠, 난 이제부터 글을 쓸꺼야! " 하며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여행을 준비하던 서른의 딸은 이런 아빠의 근심, 걱정의 엑기스가 아닐 수 없는 것이었다.

 

 뭔가 나는 그저 집에서 노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보여드리기 위해 아빠가 씻고 나오자, 나는 들고 있던 책을 보란 듯 식탁에 놓고는 엄마보다 더 먼저 주방으로 뛰어나가 부리나케 저녁 상을 차렸다. 심지어는 노른자를 깨뜨리지 않고 적절하게 익힌 반숙 계란 프라이도 아빠의 밥 위에 얹어 놓았다. 나는 마지막까지 케찹으로 슬그머니 하트모양의 데코레이션을 그려보았지만 하지만 아빠는 그냥 간장이나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_ - 

 

 아빠의 핸드폰이 울린 건 바로 그때였다. 아빠의 고향 친구분인 듯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중, 이야기는 어른들 전화 통화의 클라이막스라는 자식 자랑 타임이 시작된 듯 했다.

 

 (아니, 왜 중년어른들은 서로 몇 번 본 적도 없는 서로의 자식들 이야기에 통화의 2/3를 소비하는 걸까. 게다가 꼭 그들 집 자녀들은 SKY 출신에 심지어는 또 효녀효자다. 씨발.)

 

 어쨌든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며 모래알을 씹듯 밥알을 씹고 있는데 그 집 자식들 자랑이 다 끝나고, 인사치레로 우리 집 애들의 안부를 물어왔나 보다. 순간, " 어, 뭐 우리 집 애들이야 뭐...." 로 시작하는 아빠의 음성이 가냘프게 떨렸다. 아마도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놀고 있는 나때문에 곤란한 심경이 느껴졌다.

 

 " 뭐 우리 첫째는 (우리 언니 강미나) 여전히 다니는 유치원 잘 다니고 있지, 애가 원체 성실하니깐." 으로 시작 해서 현재 유치원에 원감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원감 이라는 단어에 특히 힘을 주며 혹시나 그 분이 못 들었을 까봐 두 번씩이나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다.

 

 그리고 드디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통화를 듣고 있던 나와 엄마는 서로 은연 중 긴장하고 있었다.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 막내는 (그러니깐 나) 원래 잘 다니고 있던 직장을 얼마 전에 잠시(?) 그만 두고 유럽에 전공관련 연수(절대 아님 그냥 두달동안 놀다 온 것이였음.) 를 다녀와서 이제 다시 곧 복직을 앞두고 있다고 했다. 우리 막내는 기술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느 곳이든 재취직이 쉽다는 말도 빼먹지 않으셨다. 그리고 이 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한 느낌이셨는지




 " 그래도 우리 집 애들은 착해......"




 착해.... 착해.... 그 뭐냐, 제일 뭐 할말 없을 때 하는 말.... 사람은 착해......

 


 전화 통화가 끝나고, 우리는 몇 년 전, 개그콘서트의 인기 코너였던 "조용한 가족" 처럼 조용히 밥을 먹었다. 아무 말도 없이 식사를 하시던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한 마디 하신다.

 

" 글이고 뭐고, 까불지 말고 그냥 다시 빨리 취직이나 해서 시집이나 가거라. 오늘 뉴스 보니깐 서른 두살 어느 시나리오 여자 작가가 굶어서 죽었다더라." 

 

-_  -

 

 고 최고은 작가의 요절 기사를 보셨나 보다.



 나도 오늘 인터넷 뉴스로 봤었다. 젊고 재능이 넘치는 예술가가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배고픔에 굶주리다 죽었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

 

 한국이 경제적으론 많은 발전을 이뤄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예술이 존중받지 못하는 한 영원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 인간을 고등高等한 생명체라고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간은 예술을 창조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 갔던 예술의 나라 프랑스의 지하철에서는, 거지행색의 기타를 맨 사람이 들어와 노래를 부르고 동전을 거둬갔다. 사람들은 박수와 동전을 아끼지 않았다. 꼭 무엇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는 우리나라의 지하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나는 깜짝 놀랐었다.

 

 어느 장르든 어느 계급이든 예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은 다른 유럽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에서는 거의 모든 지하철 역마다 길 거리의 음악가들이 있었다. 길거리 어디서든 자유롭게 노래부르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그들을 보며 응원하고 즐기는 시민들이 있다. 어찌보면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는 행위 예술가들이 있고, 길에서 그림을 그리고 파는 미술가들 천지다.

 

 "아빠! 그건 이 나라가 잘못된 거라구! 이 사회가 문제란 말이야! " 

 

 하며 힘껏 반항 해 보았지만, 아빠는 식탁에 앉아 모이를 먹고 있는 가축의 소리는 신경쓰지 않는 다는 듯 '괜히 밥에다가 케찹을 뿌려가지고는......' 하며 역정을 내며 담배를 들고 베란다로 가셨다. 나는 무안함을 애써 억누르며 김에 싼 밥 위에 도라지 무침을 얹으며 생각했다.

 

 

도저히 안되겠군.

그래

드디어 

집을 나가야 될 때가 된거야.

그래

독립을 하자 !







-


2011. 2. 10 의 일기 ,

그리고 한 달 뒤, 진짜 짐을 싸서 서울로.

선릉 친구집에서 한 달 지내고, 당산(영등포 롯데마트 앞)에서 3달을 살다가 밀린 월세 때문에, 사당 나비네 집으로 피신. 결국 지금은 나비와 사당 장미여관에서 살고 있어요. (진짜 여관이 아니고, 나비랑 내가 마광수의 골수팬이라 집이름을 장미여관이라 지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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