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 해당되는 글 3건

-

1. 소설 ‘가시나무 새’ ㅡ 그런 시절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베네치아를 자판을 두드려 지켜내던 한메 타자만이 유일한 오락이던 시절. 멍울진 가슴과 함께 핑크빛 호기심이 커져가던 때였다. 누군가는 부모님 방 옷장 속에서 이상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고 알려 주었다. 어떤 아이는 옆 학교 남고 오빠의 단단한 그곳을 만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비디오도 아는 남고 오빠도 없던 나는 조용히 초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네살, 중학교 1학년 때 였다. 지난달 초경을 시작한 친구가 말하길 빨간색 물건을 가까이하면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진작에 써 보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즈음 같은 무리에서 생리가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조급해진 나는 생리대를 미리 하고 잤더니 초경을 시작했다는 한 아이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안방에 몰래 들어가 생리대 하나를 꺼내고 안방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누웠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언젠가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여류 소설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여주인공의 첫 경험 장면이 두 면에 걸쳐 나온다. [돌처럼 단단한 것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문장을 곱씹으며 한 쪽 손으로 남자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생리대가 부스럭 소리를 내고 조용히 회전하고 있던 선풍기 바람은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알았다. 컴퓨터 오락이나 소설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른들의 유희를.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정말 여자가 되었다.


 

2. 창문에 미끄러지던 손 ‘타이타닉’ ㅡ 모두가 금을 모으던 시절도 있었다. “I am F.”라는 씁쓸한 유행어가 전국에 퍼지던 때였다. 아빠는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이 없어졌고 엄마는 급한 대로 집 안의 금붙이들을 모아 팔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빠는 결국 택시 핸들을 잡았고 엄마는 집이 아닌 곳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내 주변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디카프리오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었다. 처음 가 본 극장의 대형 스크린. 그 안에는 어쩌면 내 인생에선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을 화려한 크루즈 여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입김으로 가득한 차 안,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사랑을 나누던 장면. 그 절정의 순간 습기 가득한 창문을 치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던 손바닥. 어떠한 몸짓 보다 더욱 함축적이었던 그 장면. 디카프리오 팬이었던 친구는 그 장면에서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극장을 나온 후로 줄곧 그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생각했다. 남자와의 섹스는 어떤 느낌일까? 등굣길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학생의 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두 해 뒤 드디어 그것을 경험했다.


3. 첫 남자는 베이시스트였죠ㅡ 내 나이 열여덟. 그는 밴드부 베이시스트였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첫 경험. 아쉽게도 창문에 스르르 미끄러지는 손바닥처럼 강렬한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서툴렀고 섹스 후의 관계도 어색해졌다. 베이시스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그러다 재미 삼아 쓴 글 하나로 섹스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당신이 해 본 최고의 섹스는 무엇인가요?” 이 일을 하고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한결같이 “깊은 사랑과 함께 하는 섹스가 가장 멋진 섹스입니다.”라고 답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답이 바로 여자 섹스 칼럼니스트의 한계라고 말했다. 사소한 떨림, 금지된 선을 넘는 스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즐기는 파격. 하지만 이 모든 몸짓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 더욱 깊어진다는 것임을. 신음을 서로 연기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눈빛까지 연출하는 것은 어렵다. 순간의 쾌락 뒤에 오는 허무를 채워 주는 사랑의 눈빛.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이제껏 겪었던 모든 관계는 이 순간을 위한 베이스였다는 것을 내 나이 서른, 한 남자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SEP.2014/COSMOPOLITAN_내 섹스 라이프의 터닝 포인트(책,영화,사람)

2 0
-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이렇게 위문편지를 써 본 게 정말 얼마만인지요. 그게 아니라, 이렇게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해 쓰는 편지가 정말 얼마나 오랜만인지요. 초등학교 시절 이 계절에는 "국군 아저씨들께."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제법 자주 쓰곤 했었는데 어느덧 국군아저씨들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이 되어 있네요. 게다가 이번에는 "섹스 칼럼"과 함께 인사를 하게 되다니! 인생은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더 재미있고요.

 

 

안녕하세요. 저는 글 쓰는 여자 김얀 입니다. 그리고 이번 달부터 병영 매거진 HIM에 연재하게 될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은 저에게 특히 의미가 있는 글입니다.

 

 

2년 전이던, 그러니까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직장을 무작정 그만두고 서울로 왔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좋은 글을 쓰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개인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심심한데 그냥 야한 이야기나 한번 해볼까? 해서 글 하나를 썼는데 그 이야기 한 편이 SNS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어느덧 섹스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갖고 여러분들에게 편지까지 쓰게 되었네요.

 

 

사실 저는 섹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문학을 사랑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 무슨 글이든 쓰고 싶어 혼자 일기 쓰듯 마구 쓰던 차에 이렇게 섹스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갖게 되어 어리둥절하기도 했어요. 물론 부담이 된 적도 있고요. 특별한 교훈이나 정보가 없는 재미삼아 써 본 한 편의 글로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다양한 매체에서 러브콜을 받게 된 것도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섹스'란 남녀노소 누구나의 관심사이고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인데 이제껏 누구 하나 당당하게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더군요.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인데도 무조건 감춰야 했죠. 특히나 여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구를 감춰야만 정숙한 여자라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고, 때문에 남자들은 포르노나 돈으로 섹스를 사고파는 데서 조금씩 얻는 왜곡된 정보를 정답으로 알고 있었죠. 기성세대들은 성에 있어서는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고 숨기기에 바빴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성의식이 땅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야 말로 음지에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죠. 주변을 둘러보면 편의점만큼 많은 게 러브 모텔이고, 여자가 나오는 노래방, 안마방, 2차야 말로 그들이 만든 거 이상한 성문화 아닌가요?

 

 

저는 어릴때부터 이런 것들이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섹스란 생명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지난 밤 섹스를 한 커플 중 단지 '생명을 만들기 위해' 섹스를 하는 커플들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신이 되면 어쩌지?' 하고 피임을 고민했을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에 대해서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남, 녀 모두가 밝은 곳에서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서로 관계를 하는 둘 사이에서만이라도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무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부족함이 많은 제가 여러 사람들의 응원을 받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관심은 회를 거듭할수록 저에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공감해 주셨고 자신의 경험담과 고민들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그동안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의 친구들의 우려도 있었지만, 결국 저는 이 글 덕분에 더욱 즐거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녀 관계 아니, 성별을 떠나 인간관계와 인생이란 것에는 정답이 없더군요.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솔직하게 살아 가는 게 정답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너무 뻔한 통계자료를 이야기 하는 것 보다 제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더 현실적이라 제 이야기들도 가감없이 넣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이 더욱 매력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른 두 살인 지금까지도 좌충우돌 여기 저기 부딪쳐 상처를 받아가며 어른이 되어 가는 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니까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을 존중합니다.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순결을 지키는 사람들, 각자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본인만의 성적 취향, 그리고 돌아보면 후회뿐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저는 여러분을 존중하고, 이해합니다. 특히나 이제 20대 초반, 저와 다른 성별의 우리 장병들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읽혀지고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게 될 지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존경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들, 곧 다가올 겨울 단단히 대비하시고 마음속에는 아직 남아있는 봄의 꽃밭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2013. 10. 사랑을 담아. 김얀 드림.

 

 

----------------------------------------------------------------------------------------------------------------------------------------------------------------------------------------------------------------------------------------

 

 

 

 

 

 

 

 

 

 

 

2013년 10월 60만 우리 국군 병영 잡지 HIM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 채식주의자들의 저녁 식사] 연재 시작

일러스트는 역시, 코베 (@kovelee)

 

 

 

 

 

 

 

0 0
-

 

 

 

 1. 채식주의자의 저녁 식사



약속 장소는 사당역 근처의 채식 식당이었다. 오늘 약속은 어젯밤 우연히 봤던 어느 다큐멘터리 채널 때문이었다.


[어제 밤 10시]



'하루는 분명 24시간인데, 어째 일요일에는 시간이 이렇게도 빨리 가는 거지? 아, 내일이면 다시 출근이라니.......쉣더빡'



씻지도 않고 종일 베개와 한몸이 되어 리모컨을 돌리고 있으니 어느 덧 밤 9시. 일요일 밤 9시는 무엇을 하자니 늦고, 그냥 자자니 아까운 시간이다. 무엇을 할까 우물쭈물 하던 사이 서서히 온몸으로 퍼지는 월요병의 기운이 느껴진다. 멍하게 리모콘만 만지작 거리고 있는데 문득 '육식의 종말-우리는 왜! 채식을 해야만 하는가?'라는 다큐멘터리에 채널에 손이 멈췄다. 화면에는 돼지의 커다란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있었고 이내 돼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그때 좁은 우리에 갇혀 우는 돼지에게서 내일 아침 출근 길 지옥철 안에서의 내 모습이 겹쳐져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그래, 돼지도 감정이 있는 동물인데. 단순히 인간의 한끼 식사로 생을 마감하는 기분이 어떻겠어.  머리도 저렇게 큰 걸 보면 어쩜 나보다 더 똑똑할지도  모르지.'



이렇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이번 기회에 육식을 한번 끊어보자 싶었다. 뭐, 어차피 작심삼일로 끝날 것이란 걸 알지만, 서른 넘은 미혼 여자에겐 무엇이든 일상의 변화가 필요했다. 먼저 트위터에 접속 해서 채식 주의자 파워 블로그 소길댁 이효리를 팔로우 했다.  그리고 #채식이라고 검색한 다음 흥미가 가는 채식주의자를 몇 명 더 팔로우 했다.  꼭 그럴려고 그런 건 아니었지만, 우연찮게도 새로운 10명의 트친들은 모두 남자였다.(씨익)



다른 사람들의 트위터를 하나씩 읽어 보니 어느덧 시간은 자정. 그렇게 일요일 밤은 멀어진다. 간다는 말도 없이. 그리고 월요일은 그렇게 성큼 다가와 있다. 얼른 냉장고로 가서 마스크 팩을 꺼내 얼굴 위에 얹고  침대에 누웠다. 내 나이 서른 하나. 내가 생각했던 서른은 이게 아니었는데. 태헤란로를 바쁘게 걸어다니는 워커들을 동경하며 상경한 지 벌써 5년. 하지만 난 아직도 신림동 8평짜리 원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월세에 각종 생활비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없는 생활. 명품 가방 하나 사 본 적이 없이 숨만 쉬고 살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돈이 모이지 않는지. 통장은 여전히 빈털털이다. 어쩌면 올해까지만 하고 다시 부모님 집으로 내려가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친구들은 독립해서 서울에서 멋있게 사는 줄 아는데 이제 와서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 집에 얹혀 살 생각을 하니 그게 또 자존심이 상한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뭐.'


난 아직도 책임감도 계획성도 없는 철부지 아이란 생각도 잠시 얼굴 위가 따끔거려 눈을 떠 보니, 벌써 아침이다. 바짝 마른 마스크팩을 떼내고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평소 보다 30분이나 늦었다. 화장실로 가서 급하게 앞머리만 샴푸로 감고 머리를 묶고 급하게 뛰어 나간다.



오전 8시 30분 강남행 지하철 2호선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바밤바, 31세. 치과 상담실장]


나는 매일 아침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치과에 매일 출근하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5년 차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도 이제는 월급날만 바라보며 산다. 틈틈이 트위터를 하고, 네이트 판 시월드를 보며 댓글로 함께 남의 시어머니 욕을 하다 보니 어느 덧 퇴근 1시간 전. 마지막으로 치료를 마친 환자에게 양치에 대한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을 때 문자 하나가 왔다. 물론 나는 어젯밤 양치 없이 그냥 잠들었다는 건 비밀.



[문자 메세지]


어쩌죠. 누나.

나 지금 교수님한테 잡혀서

오늘은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미안해요.



몇 주 전, 이태원 어느 호프집에서 우연히 옆 테이블과 합석하게 되어 알게 된 4살 연하 귀요미였다. 그 뒤로 서 너 번 만났는데 볼수록 어른스럽고, 유머 코드도 잘 맞아서 오늘 저녁엔 진도를 좀 빼볼까 하던 차였다.




'아, 뭐야~ 오늘 그 정신 없던 와중에도 속옷을 위 아래로 맞춰 입었는데. 에라이.'


퇴근 시각 5분 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런 날 집으로 곱게 들어가는 건 오늘 입은 호피빤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곧바로 트위터에 접속했다. 그때였다.



[클럽 육식지옥] 채식주의자들의 모임. 오늘 저녁 7시 사당역 10번 출구 XX 채식식당에서 모입니다. 오실 분은 멘션 ㄱ ㄱ (신입 회원 상시 환영 ^^*)



사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보다 그 트윗을 올린 사람의 프로필 사진이 먼저 눈길을 사로 잡았다. 나는 남자의 프로필을 클릭해서 자기 소개란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mat_sunsang1004 (별명:맛선생) 31/ 사당/ 채식/ 수영/ 홍상수


채식과 수영을 하는 남자라니. 매력적이군. 근데 홍상수 영화를 좋아한다고? 이 자식 이거 찌질이 아니야? 흣. 그래도 뭐 동갑이니 편하고 좋네. 선그라스에 눈이 가려져 있다는 것과 아이디에 1004라는 숫자가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급한대로 한번 보자 싶어 재빨리 답글을 남긴다.


[트친님, 저두 참석이용~♡]


그리하여 도착한 식당. 그 귀퉁이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열댓명의 사람들을 발견했다. 맛선생과 그의 회원들 같았다. 그런데 어랏? 모두 남자다.


 

‘올레! 역시 신은 나를 아직 버리지 않으셨어!’



나는 그들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맨 끝에 앉아 있는 남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바밤바) : 저기, 여기가 혹시. 육식지옥?



긴장이 풀어지면 나와 버리는 사투리에 주의하며, 말끝을 살짝 올리며 물었다.



남자 : 네?



정색하는 남자를 보자 여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테이블은 죄다 여자만 가득한 여탕이다.


‘안돼,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다. 반드시 여기여야만 해.’


다급한 마음에 속으로 찬찬히 주기도문을 외며 다시 정중하게 물었다.



: 아니, 그러니까. 혹시 채식천국 육식지옥에 맛선생님 아니시냐구요.



순간 주변 남자들이 뭐냐, 쟤 교대 출신이었어? 라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건은 점점 미궁속으로 빠질 때 쯤 한 남자가 뭔가 눈치 챘다는 표정으로 거만하게 말했다.


남자1 : 아, 아니라구요~ 가시라구요.


나 : 아니, 그게 아니라 저, 맛선생......


남자1 : 아, 안 사요. 안 사!  


아니, 오늘 나의 잇 백이 좀 큰 듯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래도 나를 잡상인으로 알다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어디 선가 구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맨님~~~~~~ 채식 천국, 육식 지옥은 여기에요, 여기!"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여자들만 가득 모인 여탕. 나는 마치 내일도 월요일인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리로 불러 자기 소개 시키던 그녀들. 어쩔수 없이 나는 그 곳에 동석했다.



: 아…... 네…... 저는 바밤바라고 합니다. 뭐, 그렇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대충 저녁이나 먹자 싶어 수저를 들자 맞은 편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걸어 왔다. 아이디가 불나방이라는 여자였다.



불나방 : 아, 그런데 바밤바 자맨님은 어떤 계기로 채식을 시작하게 되셨나요?



이미 식사를 끝낸 듯한 그녀는 우아한 표정으로 손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정성들여 셋팅을 한 머리에 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내 또래로 보이는 참한 인상의 아가씨였다.


‘음, 저 립스틱 색 괜찮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가 립스틱을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뿔사. 자세히 보니 손거울 뒤에 가려진 건 립스틱이 아니라 녹말 이쑤시개였다. 그녀는 녹말 이쑤시개로 앞니를 쑤시며 초면인 나에게 질문 공세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아, 그게 그러니깐, 저기 뭐냐. 아! 맞다. 그 워낭소리 아시죠? 제가 그 영화를 감명 깊게 봐서.. 그때부터 소고기를 끊었어요.


길게 말 섞기 싫어 대충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식사에 집중을 하려는데 불나방이란 사람이 불쑥 내 손을 부여 잡았다.



불나방 : 아, 정말요? 저는 마음이요. 영화 마음이를 보고 개고기를 끊었답니다. 하, 이렇게 반가울때가. 자맨님, 우리 정말 열심히 채식 해 봐요.


그러자 불나방 옆에 앉아 있던 이허리(@hurry_up) 이라는 사람도 우리의 손을 덥썩 잡으며 말했다.


이허리 : 어머나 세상에, 지금이 바로 간증의 시간인가요? 자맨님들 전 말이죠.  치킨런을 보고 치맥을 끊었답니다. 이렇게 순수한 자맨님들을 만날 수 있다니 오늘 정말 영광입니다.


뭐.. 뭐지? 이 여자들은? 나는 왠지 등골이 오싹해져 슬그머니 손을 놓으며 화제를 돌렸다.



: 아, 아니, 저기 이 손은 좀 놓으시고.. 그.. 그러면 다들 고기는 전혀 안 드세요? 저는 채식을 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데 제대로 하려면 채식이 의외로 돈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이것저것 영양소 같은 거 따지다 보면…. 아, 특히 단백질이요!  그건 따로 식품 보조제를 먹어야 된다던데.. 그것도 가격이 만만치가 않더라구요.



그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한 여성이 있었으니. 이 여자가 바로 이 클럽의 회장 맛선생. 조영남을 연상하는 검은 뿔테 안경을 추켜세우며 동물성 단백질의 폐해에 대해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어, 저 사람이 맛선생? 분명 프로필에선 남자였는데. 뭐야, 완전  낚였잖아. 내 회비..’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문제의 프로필의 사진은 그녀가 소시쩍에 좋아했던 더 블루의 김민종의 사진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 여자회원들도 다들 나처럼 그 사진에 낚여 가입했다고 말했다. 내 기분도 덩달아 블루 -  이런 내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맛선생의 채식강연은 30분도 넘게 이어졌다. 그때 보고 있던 이허리가 도저히 못 듣겠다는 표정으로 맛선생의 말을 잘랐다.



이허리 : 그런데, 저기 맛선생님? 그래도 과학적으로도 사람에게는 동물성 단백질이 필요하다고 하던데요?


맛선생 : 아니, 허리 자맨님. 우리처럼 연약한 쿠쿠다스 심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동물성 단백질을 입에 댈 수가 있단 말입니까? 휴. 님 정말 실망입니다.


그때 무료함을 달래려 녹말 이쑤시개로 조심스레 집을 쌓아 올리고 있던 불나방이 입을 열었다.



불나방 : 저기, 자매님들. 그럼 혹시 이 방법은 어때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저.. 정액도 단백질이잖아요..



어먹, 이게 뭔 소리야. 아무리 여자끼리지만,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정액이라니. 나는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숭늉을 불나방 얼굴에 뿜을 뻔 했다. 하지만 나를 제외한 나머지 여자들은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이허리 : 불나방 자맨님? 그럼 그.. 그걸 자셔 보신 적 있나요?



그러자 불나방은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불나방 : 아,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나를 뭘로 보고! 아무리 채식하는 분이지만, 어쩜 그리 소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세요? 정말 불쾌하네요. 아니, 그게 제가 먹어 봤다는 게 아니라 그냥 뭐, 궁금하다는 거죠. 그, 뭐냐 섹스 칼럼 같은 데서 보면 그게 뭐 천연 단백질 에센스다. 뭐, 그러잖아요.



불나방의 말에 나머지 회원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 제니라고 불리는 아이디 방구쟁이가 분위기 전환을 도모했다.





 

 

 

 

 


제니 : 아니, 우리 이제 식사도 끝났는데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할까요?



외국에서 좀 살다 온 건지 어색한 발음의 여자였다. 부산 갈매기도 울고 갈 것 같은 굴곡진 눈썹 문신과, 짙게 칠한 언더라인은 전형적인 교포의 메이크업이었다. 뭔가 지적인 모습도 있긴 했지만, 여기의 일원이라는 걸 봐서는 이 여자도 조금 미친 구석이 있을 터였다.



이허리 : 그, 그래요. 술은 곡식으로 만드는 거니깐 채식 주의자들도 괜찮잖아요. 안 그래요?



맛선생 : 그. 그렇죠. 어차피 소주도 쌀로 만드는 거니까. 뭐, 쌀밥이랑 크게 다를 게 없지요? 그냥 액체 밥 정도?


그들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며 참이슬 일병을 주문했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참이슬 일병이 상병으로 꺾이고, 말년 병장이 되어 예비군 훈련장 빈명으로 나뒹굴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불나방이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녹말 이쑤시개를 이빨 사이에 꽂은 채 말했다. 처음에 만났던 그 우아한 모습은 안드로메다로 떠난 듯 했다.



불나방 : 저기, 언니들. 내 말 한 번 들어 봐. 내가 말이야, (딸꾹)  나는 정말 동물을 사랑하고 말이지, 식물도 사랑하고  말이지…… 그 리고 그 남자도 사랑했는데! 응? 내 말 듣고 있어?



점점 커지는 그녀의 목소리에 놀라 쳐다 본 불나방의 눈빛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불나방 : 야, 이허리! 너 잘 들어. 내가 말이지, 그래, 솔직히 나 한번 먹어 본 적 있다. 왜? 뭐가 잘못됐냐? (딸꾹)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잘 해주고 싶었어. 야, 다들 고상한 척 꽁지 빼지마. 특히, 새로 온 너, 바밤반가 씨밤반가. 꼭 저렇게 내숭 떠는 애들이 더 하더란 말이야….. 저 밤톨맹이 같은게 진짜 사람을 우습게 보고 말이얍.(딸꾹)



그러자 그 옆에서 젓가락으로 두릅나물을 집어 먹던 이허리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도 이미 이 세상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이허리 : 그래, 나방. 난  이해해. 솔직히 나도 호기심에…. 누, 누구나 한번쯤은 그럴 수 있잖아? 아니 근데 그게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라구. 맞아. 이 나물 맛이랑  비슷했던 것 같애. 약간 비릿하고 약간 씁쓸한? 아니, 내가 그걸 일부러 먹으려고 그랬던 건 아닌데 말이야 (딸꾹) 어먹, 나두 취했나봐.



아니, 진짜 이 여자들 뭐하는 여자들이야. 나는 그만 일어나야 겠다 싶어 가방을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니 자매가 내 가방을 지그시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제니 : 아니, 근데 자맨님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먹을 게 없어 그런 걸 먹어요. 어휴, 나는 진짜 이해가 안 가네. 아 캔ㅌ 언덜스탠.. 그 냄새 완전 락스 냄새잖아.



제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나방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불구덩이를 발견하고 당장이라도 몸을 날려버릴 불나방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아이디가 왜 불나방인지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불나방 : 야, 이 방구쟁이 무식아. 그러는 넌 그 냄새가 락스 냄새 같은지 어떻게 알고 있냐? 야 그리고 그건 그 남자가 뭘 먹었는지에 따라 맛과 냄새가 틀리다고! 술, 담배 안하고 규칙적인 생활하는 남자는 그게 또 괜찮다니깐? 과일 많이 먹은 남자들은 의외로 달착지근하기까지 하다고! 그러니깐 그 뭐냐, 파인애플! 파인애플 같은 거 먹고 나면 특히 더 달콤하다고! 그러니까 내가 잡지책에서 보기론 말이야. 딸꾹.



불나방은 제니의 면상에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 지 닭똥같은 눈물을 뚝 뚝 흘렸다.



불나방 : 야, 근데 내가 진짜 그 인간을 사랑했거든?? 근데 이 샹놈이 날 배신하고 딴 년한테 갔어. 흐흑. 나는 몸도 마음도 심지어 만날때마다 모텔비도 내가 다 냈다.  나쁜놈…...(흐흑)



그녀는 정말 화가 났는 지 앞에 쌓어 놓은 녹말 이쑤시게로 만든 집을 거칠게 허물어 버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허리 : 아니, 불나방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다 털어 놔 봐요. 내가 다 들어 줄게. 대신 내 얘기 8시간짜리 있는데 이거 다 들어 줘야 돼.... 딸꾹 



이렇게 취한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대화가 시작 되었다.



불나방 : 아니, 어느 날 이 남자가 솔직하게 말해보라는 거야. 이제껏 몇 명이나 만나보고 자봤냐고. 자기는 나에 대해서 모든 걸 알고 싶다면서. 그래서 나는 말해줬지. 왜? 나는 솔직하고 싶었거든. 솔직한 거 그게 서로한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남자가 먼저 이야기 했어. 그리고는 내가 말했지. 처음 만났던 남자 얘기 들을 때는 괜찮다고 하더니 두 번째 남자 이야기에선 핸드폰을 만지며 딴청을 하다가 세 번째 남자에서 갑자기 너 이렇게 헤픈 애였냐고 버럭 화를 내는 거야. 사실 아직 반도 얘기 안 했는데...... 아니, 지는 어디 가면 늘 100명 조금 안된다고 자랑하는 놈이.


 

이허리 : 그..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뒤로 연락 없었어요?



불나방 :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나가서 며칠 뒤에 카톡 하나 달랑 왔는데 한다는 얘기가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대. 우리 나라에서는 남자는 괜찮지만, 여자는 아직 안 되는 거라고. 그리고는 앞으로 만나는 사람한테는 솔직하게 다 말하지 말라는 거야.  그리고 그런 것도 먹지 말고, 난 아무것도 모르요~ 순진한 척을 하라고. 그래야 남자들이 좋아한다고. 나쁜놈. 그런 놈을 나는 뭐가 좋다고 진짜 밑도 끝도 없이 다 퍼다 줬을까? 어떻게 아직도 과거를 들먹이면서 사람을 판단하니? 차라리 이제는 좋은 데 취직도 했고 내가 지겨워졌다고 솔직하게 말했으면 내가 이렇게까지 억울하진 않았을 거야. 아니, 말 못하는 짐승들도 지한테 모든 걸 준 사람 가슴에 이렇게 대못은 안 박잖아. 진짜 그 자식은 짐승 만도 못한 놈이야......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소랑 돼지를 먹겠니. 진짜 소,돼지도 그 인간보단 낫겠다.



이허리: 어...... 나.. 나방 자매 울지 마요...... 다시 또 좋은 사람 만나겠지......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시작..



불나방 : 아니, 나는 그 인간 만나고 나서 부터는 사람한테 받을 상처가 겁이 나서 남자 안 만나. 그냥 지금 처럼 개 한마리 키우면서 개 엄마로 혼자 사는 게 낫지. 이게 속 편해.


 

나방자매의 눈에선 폭풍 눈물이 쏟아졌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다들 아무런 대응이 없다. 주위를 둘러보니 맛선생은 벽에 기대어 꿈나라로 떠나신 지 오래였다. 까만 뿔테 안경은 코끝에 아슬아슬 걸려있다. 방구제니는 맛선생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베고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허리는 어떻게든 불나방을 진정시켜 자신의 8시간 짜리 이야기를 터 놓으려 준비 중이다. 이 사태를 어쩔 줄 몰라하고 있을 때 고맙게도 내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나는 내 어깨에 기대 눈물 콧물을 짜고 있던 불나방을 슬그머니 밀쳐내고 화장실로 달려갔다. 4살 연하 귀요미였다.



귀요미 : 누나, 지금 어디야? 나 지금 강남인데, 내가 누나 있는데로 갈게. 나 누나 볼려구 겨우 빠져나왔어.


: 어, 정말? 나 지금 사당인데.. 너 술 많이 안 먹었어?


귀요미 : 아니, 한 잔도 안 먹었었어! 중간에 빠져 나와서 누나 보고 가려구. 과일 안주만 몇 개 집어 먹으면서 틈을 노리고 있었지. 하하.


: 과, 과일? 그럼 너 혹시, 파, 파인애플도 먹었어?


귀요미 : 응? 갑자기 그건 왜 물어봐? 나 과일 중에서도 파인애플 제일 좋아해. 나 매일 아침마다 조깅하고 파인애플 꼭 먹잖아.


파인애플과 운동이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만 보자. 얘는 담배도 안 핀댔지. 어먹, 내가 저 나방년에 홀려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게 두 뺨이 붉어졌다.


: 그.. 그래 일단 알았어. 그럼 사당역 10번 출구로 와. 나도 지금 나갈게.



거울 앞에 서서, 나는 화장을 꼼꼼하게 고치고 화장실을 나왔다. 얼핏 보니 클럽 육식지옥 회원들은 가지런히 잘라놓은 과일 안주처럼 곱게 식당 바닥에 누워 있었다. 나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 곁을 슬쩍 지나쳐서 식당 밖으로 나왔다. 



'하여튼 SNS로 만난 관계가 다 이런 거지, 뭐. 내가 오늘 집에 가자마자 트위터 어플 지운다…....’



10번 출구 앞에서 5분 쯤 기다렸을까? 택시에서 내리는 귀요미가 보였다. 하얀 치아를 보이며 웃으면서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을 보니 초여름 외갓집 시골 길에서 봤던 커다란 밤나무에 눈처럼 내려앉은 밤꽃이 떠올랐다.



귀요미 : 오늘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누나. 대신 오늘은 내가 쏠게. 우리 술 마시러 갈까?



하며 손을 잡는 남자. 나는 이미 충분히 마셨다고 하곤, 살짝 웃으며 저 멀리서 빛나는 간판 하나를 가르켰다.



[코자쟈 모텔]



당황하는 남자. 남자는 나를 보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듯 했다. ‘그래,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는 어린 시절 다녔던 그 시골 길, 흐드러지게 폈던 밤 꽃나무를 생각하며 남자의 팔짱을 꼈다. 남자는 나를 한번 쳐다보곤 정말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애써 모르는 척하며 남자의 팔을 당겨 내 가슴쪽으로 밀착 시켰다. 이제야 뭔가 눈치챈 듯 징긋 웃는 남자. 우리는 편의점에서 컵라면과 캔맥주를 사고 코자쟈로 향했다. 어디선가 시원한 밤바람에 알싸한 밤꽃 향기가 우리의 코를 간지럽혔다. 밤 바람과 함께 남자의 걸음이 시원하다.

 

 






 

 

2011년 내 서른살의 가을.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직장을 관두고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작가가 되는 길을 몰라 개인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고 있다가 재미삼아 써봤던 이 한편의 이야기로

여러 매체의 러브콜을 받게 되었고 섹스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습니다. 

섹스에 대해 해박한 지식도 지대한 관심도 없던 터라 이런 상황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소설가를 꿈꾸던 제가 의도했던 방향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곳에 어떤 글을 쓰든 내 글을 봐 주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행복하고 즐거웠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저의 글을 좋아해주었던 것도 이제껏 쉬쉬하던 [섹스]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수면 위로 끌어 올린 것 때문이더라구요. 그런데 역시나 처음부터 연재를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라 여기 저기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고,결국 15부 쯤에 흐지부지되다 글을 쓰는 걸 중단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뒤 2013년 가을. 국방부에서 후원하는 60만 우리 국군장병들의 병영잡지에서 연락을 받고 다시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내 서른살의 추억이 듬뿍 담긴 이야기들이라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다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일러스트는 나의 좋은 친구이자 든든한 동료 코베(@kovelee)의 그림입니다.

 

 

 
 

 

 

 


1
블로그 이미지

김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