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지만, 뭔가를 쓴다는 핑계로 온 종일 좁은 방 천장을 보고 누워 너를 기다리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나는, 너의 그 바쁜 하루가 부러웠다.



 종일 쉬지 않고 울리던 너의 전화기와, 여보세요 대신 직함과 이름을 말하던 너의 딱딱한 목소리. 내일 스케줄을 알 수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지방 출장.



 처음부터 두꺼운 패딩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던 너의 모습 때문일까? 한국에 돌아와 너를 옆에 두고 누운 지금도 TV에서나 볼 수 있는 너의 일터와 그 속에서 단정한 정장을 입은 너의 모습을 나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파리에서의 3일 째, 생각했던 것 보다 폭이 좁았던, 갈색에 가까운 물빛의 쎄느강 어느 다리 위에서 너를 처음 만났다.

 



 "저기, 한국 사람이시죠?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네가 입고 있던 노스페이스 점퍼 때문이 아니더라도 왠지 네가 한국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너는 그때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며 긴 렌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나의 부탁에 당황 한 표정을 보이면서 내가 건넨 카메라를 받아들고 몇 걸음 물러서서 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 한번 확인해 보세요. "



 라며 카메라를 건네던 너는, 순간 삐죽 내민 내 입술을 언제 본 건지 살짝 웃으며 다시 찍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며 카메라를 건넸다. 아까 보다 뒤로 몇 발짝 더 물러섰다가 셔터를 몇 번 누르더니, 다시 앉아서도 몇 번 누른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또 한 번 찰칵. 그리고는 당당하게 카메라를 내밀던 너. 나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카메라를 받아들고는 주절주절 말을 했다.



 "아니, 솔직히 배경 사진이야 요즘 인터넷 검색만 하면 작가들이 멋있게 찍어놓은 것 많잖아요. 그게 굳이 뭐가 중요해요? 저는 제 사진이 제일 중요해요. 혼자 하는 여행은 너무 좋은데, 이렇게 사진 찍을 때가 불편하단 말이야. 특히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민망해."

 

 몇 장을 확인해 보니,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사실 사진 포커스는 별반 다를게 없었는데, 내 표정이 좀 더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근데 제가 한국 사람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



 카메라의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던 내 앞에 서서 네가 물었다.



 "여행하는 동안 느낀 건데, 노스페이스 점퍼 입고, 제일 좋은 카메라 들고 있는 남자는 무조건 한국 남자예요. 그리고 몇 몇이 뭉쳐 다니면서 썬 그라스에 루이비통 가방 든 여자는 중국 아니면 한국여자. "



 내심 진지한 내 표정 때문인지 너는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며......



 "어디 봐요, 나도 그 쪽 사진 한 장 찍어 줄게요. "

 

 그러자 너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목에 매고 있던 카메라를 나에게 건넸다. 제법 무겁다. 렌즈를 돌려 조절하면서 오른쪽에는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담고, 왼 쪽 끝에는 천천히 지나가는 배의 꼬리가 조금 보일 때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제는 흘러가는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카메라의 셔터 음. 둘이 같이 서서 카메라 액정을 확인하니, 겨울 정오의 과하지 않은 햇살을 받은 몇 분전의 네가 활짝 웃고 있었다.


 

 


 

 "우와, 사진 잘 찍으시네. 이거 완전 베스트 컷이다. 안 그래도 혼자 다니느라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서 오늘 그냥 이대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고마워요."



 "아, 오늘 돌아가시나 봐요? 어느 나라로?"



 "아, 그게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가요. 그리고는 하루 쉬고 바로 출근. 갑자기 취직이 되는 바람에 급하게 표 끊어서 와서 아직 정신이 없네요."



 2 주 동안 영국을 시작으로 이태리와 스페인을 갔다가 마지막으로 파리에 왔다던 너는, 촉박한 시간 탓에 나라별로 하루는 일일 시티투어를 하고, 둘째 날은 좀 더 여유를 두고 그 중 좋았던 곳을 천천히 돌아보았다고 했다. 오늘은 몽마르뜨와 밤의 에펠탑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고 공항으로 간다던 너. 그에 반해 특별한 계획도 일정도 없이 파리에 온 3일 동안 아직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못 봤다는 내 얘기에 너는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럼 몽마르뜨 언덕은요?"



네가 물었다.



"안 갔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루브르는요?"



네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내가 다시 답했다.



"개선문, 샹젤리제, 베르사유?"



"아니. 아니. 아니."



 너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 그럼 이틀 동안 대체 뭘 했어요? 그럼 파리엔 왜 온 거예요?"



 글쎄,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이틀 동안 뭘 했던 걸까? 그리고 왜 파리에 온 걸까?



  "그냥, 독일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에 무작정 파리로 온 거였어요. 사실 이번 여행에서 프랑스는 빠져있었는데, 독일에서 마지막 날 갑자기 파리에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뭐 굳이 여기저기에 가지 않아도 파리는 파리 그 자체잖아요. 그냥 여기가 파리잖아요. 파리의 공기, 파리의 사람들, 그리고 쎄느 강 이라면 이틀 동안 충분히 봤어요. 이제 오늘 반짝이는 에펠탑만 보면 충분해요. "



 그때 너는 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목의 검은 전자시계를 한 번 보고는 불쑥 같이 몽마르뜨로 가자고 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와서 몽마르뜨 언덕도 안 보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잘 찍어 준 사진에 대한 보답으로 일일 가이드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뭔가 대단한 결심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너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을 때 하늘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쏟아낼 듯이 잔뜩 부푼 먹구름. 귓가로 스쳐 불어오는 바람도 전 보다 조금 더 차가워져 있다. 주머니 속에 있던 장갑을 꺼내 끼고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니, 과연 이것이 보들레르의 시처럼 파리의 우울이구나 싶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도 지치지 않고 언덕을 오르며 몽마르뜨에 대해서 설명해 주던 너.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도 했고, 많은 예술가들이 살던 곳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럼 뭘해요. 지금은 그냥 과거의 영광을 등에 업고, 그저 관광객들한테 그림이나 팔아먹는 동넨데......"



 나의 말에 너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그. 그래도 그 뭐냐. 고흐도 여기 살았었고.... 또.. 그 누구라고 했지? 아, 어제 분명 들었는데...... "



 "환락가였기도 했죠. 뭐 지금으로 말하자면 집창촌정도 되려나? "



 집창촌이라는 나의 말에 너는 자리에 멈춰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나쁜 뜻이 아니라. 고흐도 그렇고 보들레르도 그렇고 다 창녀랑 연애 했잖아요. 우리 나라 예술 쪽도 마찬가지야. 이상의 금홍이도 백석의 자야도 다 기생이고 창녀들이었잖아요, 그러고보면 창녀들이 예술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 



 너는 초면의 남자에게 창녀라는 말을 서스럼없이 하는 내가 놀라운 건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왜요? 이건 역사적인 사실이라구요."



 너는 갑자기 한숨과도 같은 실웃음을 뱉더니, 어서 올라가지고 재촉했다. 네 발걸음을 따라 한걸음씩 걸으니 그제서야 초면에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양 옆에둔 좁은 오르막길을 올라,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 옆의 벽은 그래피티로 칠해져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네가 손을 내민다. 아무래도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불안했나 보다. 손 대신에 한 쪽 팔을 조심스레 잡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작은 광장이 보인다. 곳곳에 이젤을 편 화가들이 보인다. 어떤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려준다며 호객 행위를 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 이름 없는 길거리 화가의 에펠탑 그림 앞에서 너에게 말했다.



 "예전에 친구가 배낭여행으로 파리에 왔었는데, 몽마르뜨를 보고 엄청 실망 했었대. 상상 속엔 아주 로맨틱한 언덕이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관광객들이랑 관광객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들만 바글바글. 그냥 우리나라 어린이 대공원 같은 느낌이었대. "



 그 말에 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 쪽으로 가면 파리 시내 전경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걷는다.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회색빛 하늘 아래로 회색빛 파리 전경이 펼쳐졌다. 같은 유럽이지만 프라하와 독일에서 보던 전경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계단에 앉아 몇 분 동안 서로 말 없이 파리 시내를 구경했다. 먼저 말문을 연건 나였다.



 "근데, 여자를 사 본 적 있어요?"



 옆에 앉은 너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없음 말구요."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를 보고 얘기 했다.



 "그런 얘기 전에 먼저 이름부터 물어 보는 게 순서 아닌가요?"

 

 아, 그런가?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이름. 너도 따라 웃으며 이름과 나이를 말했다. 나보다 2살이 어린 스물여덟. 그리고 이제껏 준비해오던 시험에 합격해서 다음 주부터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청와대? 내가 사는 나라에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그 안에는 정말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진짜 밥을 먹을까? 순간 청와대라는 곳이 이 곳 몽마르뜨 보다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너는 나에게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작가라고 말을 해 버렸다. 너는 조금 놀란 눈으로 어떤 책을 쓰냐고 물었고, 서점에 가면 내 책을 볼 수도 있냐고 했다. 나는 그냥 유명하지 않은 여행 작가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너는 어쨌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는 말과 작가라고 하니 왠지 뭔가 달라 보인다고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여행 작가이기는커녕 이번 여행에는 노트 한 권 가져오지 않은 다른 여행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뒤 늦게 왜 괜한 거짓말을 했을까 싶기도 했다. 그냥 솔직히 모든 게 지겨워져서 별 다른 계획도 없이 배낭을 메고 온 거라고, 사실 이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조금 더 편했을 것을.



  

 


 

 무심히 눈앞에 펼쳐진 파리 시내의 전경을 보던 중, 너는 힐끗 손목의 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이제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지금쯤 내려가서 에펠탑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오후 6시 정각 처음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자고 했다. 어제 파리 일일투어 가이드에게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전수 받았으니,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뭐든 대충 대충인 나와는 다르게 시간을 계산해가며 계획을 짜는 모습과 믿고 따라오라는 너의 말이 신선했다.



 다시 처음 우리가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탄 지하철은 아까 보다는 조금 더 붐볐다. 우리는 출입문 쪽에 기대서 나란히 서 있었다. 별다른 얘기 없이 서로 멀뚱히 지하철 안에 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5분 쯤 흘렀을까, 어느 역에서 기타를 맨 중년의 흑인 남자가 탔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전차가 출발할 때, 그 남자는 우리 바로 앞에 서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노래였는데, 능숙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빠져 있다 보니, 허름한 옷차림이 보인 건 나중이었다.



 지하철 안의 승객들도 미소를 짓고 노래 하나가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친다. 노래를 마친 남자가 작은 종이 박스를 들고 승객들 사이를 지나치니, 여기저기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주고 박스에 동전을 채워준다. 우리도 동시에 마주보고는 웃으며 주머니 속의 동전을 찾았다.



 순간 서울의 지하철이 생각났다. 비좁은 틈 사이로 찬송가 카세트를 목에 걸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의 피곤한 눈. 강력본드나 대일밴드를 검은 가방에 넣고 파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는 무심한 시선들. 그런데 파리에서는 지하철 안에서도 예술을 파는구나. 과연 여기가 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어느새 해는 서쪽 끝으로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유럽의 겨울은 오후 4시만 넘어서도 이렇게 차분하게 어두워졌다. 너의 발걸음을 따라 가만히 걷고 있으니, 몇 시간 전에 만난 사이인데도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비포 썬라이즈라는 영화 알아?"



 내가 물었다.



 "아니."



 네가 답했다.


"레오 까락스는?"


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뭐지?"



네가 나에게 되물었다.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고 있던 너. 하긴, 지금 중요한 건 일단 배고픔을 달랠만한 싸고 훌륭한 식당을 찾는 것. 제법 오래 걷다가 어느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연어 샐러드와 탄산수를 시켰고, 너는 치킨 샌드위치와 콜라를 시켰다. 별다른 말도 없이 식사를 끝내고 굳이 네가 내겠다는 걸, 겨우 각자 계산하는 걸로 합의를 했고 우리는 다시 에펠 타워 방향으로 걸어간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그때가 오후 6시의 20분 전이었다는 것.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진 너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자, 이제 여기서부턴 눈을 감아야 돼."



 너는 불쑥 내 뒤로 와서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나를 앞으로 걷게 했다.



 "자, 몇 발자국만 걸으면 됩니다. 눈은 절대 뜨지 마요. 눈 뜨면 누나만 손해니깐."



 어찌된 게 처음 보는 나보다 네가 더 떨리는 듯 했다. 나는 알겠다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너는 뒤에서 계속 말을 걸어온다.



 "파리에 갔다 온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말하더라. 이 반짝 거리는 에펠탑 한번 보면 자려고 눈 감을 때 마다 이 에펠탑이 자꾸 눈앞에 나타난다고...... 근데 진짜 나도 어제 그랬다니까. "



 나 역시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과연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은 어떨까? 그때 너는 뒤에서 조그맣게 숫자를 센다. 자, 5, 4, 3, 2, 1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에펠탑 가르쳤다.



 순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낮은 환호성과 박수소리들. 전체가 은은하게 붉게 물든 에펠탑 위로 수 만개의 불꽃이 반짝인다. 거대한 철근 구조물은 저 반짝이는 옷 때문에 순간 파리 전체를 동화 속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신기하게도 저 눈부신 반짝거림에 맞춰 나의 심장도 같이 빨라졌다.



 "어때? 진짜 예쁘죠?"



 너는 처음 손님을 데리고 온 초보 가이드처럼 약간의 긴장감을 띈 얼굴로 물었다.



 "응. 진짜 너무 예쁘다."



 어떻게 표현을 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너무 예뻤으니. 둘 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별다른 말없이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던 너는, 이제 공항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조금 늦었다며. 나는 약간의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 하루 고마웠다고 말하고 나도 내일은 다시 런던을 거쳐 며칠 뒤엔 한국으로 간다고 말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너는 점퍼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서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한국에 오면, 밥 사줘요.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거 누나도 알죠?"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던 너.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점처럼 작아지던 네 뒷모습에도 에펠탑은 그 자리에서 아까와 다르지 않게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주위의 다른 관광객들 틈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게스트하우스로 갔고, 뒷날 아침 런던 행 유로라인 2층 버스에서 다시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런던 친구 집에서 며칠을 보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시차적응으로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중,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긴 신호음 끝에 들리는 너의 잔뜩 긴장한 너의 목소리. 내가 누구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먼저 지금 근무 중이라 내일 전화하겠다는 말을 하고 끊었다. 아, 그렇지. 너는 이제 일을 시작한댔지.



 그리고 뒷날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라는 전화가 왔고, 우리는 그 며칠 뒤 명동에서 만났다. 명동은 너의 직장과 나의 집의 중간이었다. 유명하다는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에펠타워를 이야기하며 웃다가 우리는 결국 같은 택시를 타고 신촌의 어느 모텔 앞에서 내렸다. 마치, 처음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함께 몽마르뜨로 가는 지하철을 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뒷날 아침 눈을 떠보니, 새벽 일찍 바로 출근한다는 너의 쪽지가 모텔 전화기 옆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괜히 만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생 못 잊을 파리에서의 추억으로 남겨둘 걸 그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너의 문자 메시지를 몇 개 무시했었는데, 결국 며칠 뒤 나는 또 명동의 어느 칼국수 집에서 너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신촌으로, 모텔로, 너는 다시 이른 새벽 출근을 하고 나는 혼자 침대에 멀뚱히 누워 있다가 느즈막이 혼자 모텔을 빠져나왔다.



 그런 만남을 몇 번째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애인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처럼 여행자들도 아니었다. 이제는 뭔가 정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너는 항상 바쁘고 피곤했다. 나 역시 너에겐 늘 뭔가를 열심히 쓰는 중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 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야간 근무와 곧 있을 행사 준비를 끝내고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네가 집으로 찾아 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라 너를 침대에 앉혀두고는 급하게 화장을 했다. 침대에 앉아 의미 없이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고 있던 너는 오늘도 역시나 피곤해 보였다. 먼저 침대에 누운 네 옆에 나도 살짝 누웠다. 오늘은 이렇게 누워 밤이 될 때까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 만나 밤의 에펠탑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침대 옆의 큰 창으로 엷은 보라색 커튼을 가볍게 뚫은 겨울 정오의 햇살이 거침없이 새어 나온다. 너는 역시나 별 다른 말이 없고 건조한 입술로 다가온다. 한 낮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모든걸 숨김없이 내 보인다. 미간에 인상을 쓰고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너. 목 아래로 작은 점 두 개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탄탄한 가슴 근육과 옅은 커피색의 유두. 그리고 그 아래 조용히 숨어있던 배꼽과 그 옆에 난 작은 상처도 보인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과 순간의 떨림이 엉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웠다. 나는 가만히 앉아 너를 봤다. 한 낮의 해가 비춘 너의 적나라한 몸과 얼굴을. 너 역시 내 모든 걸 보았을까? 옅은 잠에 빠져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너의 가슴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순간 너의 마음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한 빛이 들어온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며 차라리 네 연락처를 파리 길거리 어디에서 잃어버렸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든 네 곁에 나도 따라 누웠다.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 보았던 반짝이던 밤의 에펠탑을 떠올려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발밑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덥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반짝이던 에펠탑과 차가운 밤공기와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제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aris. 1월 23일, 밤의 에펠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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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하고 이상한 여행기] "SINGAPORE ㅡ Singapore River"  (62) 2011.09.02

 


 2011년. 내 서른 번째의 그 여름에 나는 무엇에 홀렸거나 조금 미쳐있었던 것 같다.




 독립을 하기 위해 서울로 왔고,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다녔지만, 두 번째 월급을 받기 하루 전에 나는 사직서를 쓰고 있었다. 친구들에겐 독립을 하였다고 큰소리를 쳤다. 아직 가족과 같이 살고 있는 친구들에겐 캥커루 족을 들먹여가며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했고, 독립 대신 시집을 택했던 친구에겐 비겁자라고 놀렸다. 하지만 나는 영등포의 여섯 평짜리 방세 하나 내 힘으로 내지 못하고 부모님께 손을 벌려야 했으니 사실 나 역시도 제대로 독립하지 못하였다.




 이번 여행은 갑작스러웠다. 학창시절 생활 기록부에는 항상 충동적이고, 단순하다. 라는 담임선생님들의 날려 쓴 글씨가 있었다. 학교를 졸업해도 항상 충동적이고 단순한 나는 통장 잔고도 확인하지 않고 일단 티켓부터 예약했다. 인천 출발 싱가포르 도착 3개월 오픈 티켓. 아버지에게는 직장을 그만둔 것도 얘기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여행에 대한 계획은 전혀 세워 놓지 않고 출발 전 날까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어떤 여자가 섹시하냐. 망사 스타킹이냐, 간호사복이냐, 하는 문제로 시간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 대해서 물어보는 친구들에겐, 대충 30일 동안 동남아 5개국이 목표라고 말을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와 대충 급하게 짐을 챙기고, 세 네 시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 도착한 오전 7시의 인천공항 내 ATM에서 통장 잔액을 확인하고는 오랜만에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 엄마. 공항입니다. 어쩌다 보니 돈이 조금 모지라. 100만원만 융통 해 주세요. 이번에는 정말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




 통장 잔액은 여행 갔다 와서의 생활비는커녕 당장 여행에서도 턱 없이 부족한 잔고였다. 스스로도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 전세금으로 돈 다 털어주고, 지금 내 통장에 딱 180만원 남아 있다. 어쨌거나 이 돈 다 보낸다. 이번엔 제발 실망시키지 마라.]




 천사 같은 나의 엄마. 서른 되어도 여태껏 철없이 겉으로만 도는 딸은 감사하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핸드폰을 스위치를 껐다. 글을 쓰기 위해 여행을 한다는 건 사실 핑계였다. 나는 이제껏 많은 나라와 도시를 떠돌았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어떠한 떨림도 없이 출국 심사대를 거치고, 공항 화장실의 식수대에서 타이레놀 두 알과 수면제 하나를 먹고 비행기 좌석에 앉았다. 비행기 착륙 시에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심한 항공성 중이염 때문이었다.




 어지럽게 흩어진 구름을 따라 6시간 후면, 또 다른 세계가 나타나겠지. 사실, 이십대 초반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는 나는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난 어디든지 갈 수 있고, 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감에 창 밖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담요를 둘둘 말고 잠을 청했고, 그렇게 몇 번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뜨니 어느새 싱가포르의 시간과 날씨를 알리는 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창이공항이라고 했다.




 싱가포르 - 깨끗한 거리, 작은 도시 국가, 멀라이언 파크의 야경. 내가 싱가포르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이 정도. 사실 나는 처음부터 싱가포르에 큰 흥미가 없었다. 말레이시아와 인접해 있고, 동남아 다른 국가로 가는 저렴한 비행기 편이 많다는 이유와, 사실 이 곳에 친구 J가 살고 있으니, 호텔비가 절약된다는 점이 싱가포르를 선택한 가장 큰 이유였다.

 

 


 

 창이 공항에서 J집이 있는 차이니즈 가든 역 까지는 거의 동과 서쪽으로 끝에서 끝이었다. 직장 때문에 싱가포르에서 지내고 있던 J는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라고 했지만, 택시를 탈 만큼 여유가 없던 나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MRT(싱가포르 전철)를 타고 차이니즈 가든 역에 내렸다. 50분쯤 지났을까, 차이니즈 가든 역 앞의 친구의 집은 고급 콘도였다. 부자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나는 입구에서 부터 막혀버렸다. 콘도 입구의 철문은 열쇠를 가진 입주자들만 들어갈 수 있었고, 문 안쪽에는 복장을 갖춰 입은 경비들이 들어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했다. 철문의 틈 사이로, 경비원을 불러 나는 친구 집을 방문하러 한국에서 왔다고 말해 봐도 소용이 없다. 아니, 이렇게 융통성이 없나?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J에게 전화해서 경비원과 통화를 시키고, 내 여권까지 확인을 하고 방문객 장부에 이름과 방문목적 나갈 시간까지 적어 사인을 하는 등 입국 심사보다 더 까다로운 절차를 걸친 후 나는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부자들이란 여러 가지로 사람을 귀찮게 만드는 군.'




 콘도의 내부는 잘 가꿔진 정원과 야외 풀장 그리고 몇 개 건물이 꽃 이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J의 집은 카멜리아. 내가 나고 자란 남해의 섬마을 집 마당에 피던 동백. 신기하게도 추운 겨울에 새빨간 꽃망울을 피우던 그 동백을 난 사랑했다. 실제로 이 건물 옆의 정원에는 핑크색의 화려한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일 년 내내 여름 날씨의 싱가포르에서 보는 서양 동백꽃 역시 아름다웠다.




 건물에 들어가는 입구도 카드키가 필요했지만, 다른 사람이 들어갈 때 몰래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는 J가 미리 말해준 대로 11층에 내려서 현관문 앞의 신발장 속 까만 운동화 속에 열쇠를 찾았다. 두꺼운 금속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 탁자 위엔, 싱가포르 지도와 이 나라의 교통카드, 그리고 핸드폰 하나가 놓여있었다. 에어콘을 켜고 짐을 풀고 앉아 있으니 탁자 위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일이 바빠 오늘 좀 늦을 것 같다는 J였다. 남자의 매너와 센스는 타고나는 법. 특별히 잘 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학창시절부터 주위에 여자가 많았던 J의 매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그 날 J는 아주 늦은 밤 돌아왔다. 우리는 웃으면서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에서 잤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이미 J는 출근을 한 뒤였다. 한국 중공업 회사의 싱가포르 지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 J는 7월이 1년 중 가장 바쁜 달이라고 했다.




 그와는 다르게 싱가포르에서의 나의 일과는 아주 심플했다. 오전 10시 쯤 일어나서, 근처 로컬 시장에서 싸구려 중국 음식을 먹은 뒤, MRT를 타고, 아무 역에서 내린다. 그리고는 정처 없이 걷고, 더워지면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서 책을 읽고, 다시 걷다가 운이 좋아 근처의 어느 공원이라도 발견하게 되면 벤치에 앉아서 사람 구경을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도 이제 지겨워 질 때쯤이 되면 J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밤이 되면, 퇴근을 하고 돌아온 J와 함께 낮에 다운 받아둔 한국 프로그램을 보면서 오늘의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탄 종 파가 역에 갔다 왔어"


 라고 말하면 J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긴 특별히 볼거리가 없을 텐데?"



 그럼 나는 짐짓 무안해져서



 "뭐 어때서, 그 역 근처 문구점에서 노트도 샀는데"



 하곤 말을 돌렸다.


 언젠가 한번은


 "오늘은 센토사 섬 실로소 비치에서 처음 만난 독일 애들이랑 수영을 했어"


 라고 말하자, J는 이건 죽어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거기 인공해변이라서 여기 사람들은 절대 수영 안 해."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온 몸이 가려워지는 것도 같았다.

 


 벌써 열 번째 싱가포르의 아침. 실은 싱가포르에서 3-4일 정도만 있다가 인도네시아로 가려고 했지만 계획은 틀어져버렸고, 나는 또 느지막이 일어나, 리틀 인디아 같은 이국적인 동네를 걸었다.




 싱가포르는 여자를 위한 도시다. 작고 깨끗한 도시국가. 편리하고 다양한 쇼핑센터. 강력한 법치국가이기 때문에 밤늦게 혼자 다니더라도 사고가 날 확률은 극히 낮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나라에는 어느 나라 국민이 됐든 마약을 운반, 소지, 보관하는 자는 사형이고, 남자들에게는 태형이라는 제도도 적용된다.) 그리고 중국계와 말레이시아, 인도와 아랍계 등등 다양한 인종과 언어가 섞여 색다른 문화를 만든다. 개방적이고 친절한 국민들과 꽃과 나무가 많은 도시. 어떤 여자가 이런 것들을 마다할 수가 있을까.




 외출도 귀찮아지는 날엔, 콘도의 야외 풀장에 태닝 크림을 바르고 누워 책을 읽으면서 집안 청소를 하고 있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J의 퇴근 시간을 기다리면서, 밥을 하고 있으면 왠지 모를 성숙한 여자의 느낌이 들었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일상 같은 여행을 보내던 중, 여전히 늦은 퇴근을 하고 돌아온 J는 오늘은 너무 피곤하다며 먼저 방에 들어갔고, 나는 늦게까지 TV를 보다 거실 소파에 누운 채 그대로 잠이 들었는데, 꿈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내 한쪽 가슴을 쥐고 세게 흔드는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한 꿈에 놀라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오전 9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고, 아파트 밖 어디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닮은 새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아침이었다.




 샤워를 하고, 어제 널어둔 빨래를 개고, 여느 때처럼 근처의 로컬 식당에서 중국식 볶음밥과 사탕수수 음료를 마시면서 늦은 점심을 때우고 전철을 탔다. 아침의 불쾌한 꿈 때문이었을까? 왠지 오늘이 아니면 멀라이언 상을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래플스 플레이스 역에서 내려 천천히 걸었다. 역시나 덥고 습한 공기. 중간에 방향을 잃기도 했고, 잠시 카페에 앉기도 해서인지, 멀라이언 파크에 도착하자 주위는 해는 서쪽 방향으로 조금씩 내려앉는다. 그렇게 싱가포르의 밤이 또 찾아왔다.



 

 



  

 멀라이언은 상상했던 것 보다 크지는 않았다. 입 밖으로 정말 물을 쏟아내는 물줄기는 작은 입자로 주위에 흩어져서 나를 비롯해 그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의 머리칼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어느 관광 포인트가 그렇듯 한 없이 설레는 표정을 가진 사람들 틈에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불쾌하지 않았다. 그 앞 싱가포르 리버 맞은편으론, 이제는 또 하나의 싱가포르의 명물이 된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과 여러 건물들이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고 서있다. 멀라이언 파크 계단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니, 잘 만들어 놓은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참을 앉아있다 문득 잊고 있었던 아빠 생각이 나서 로밍 된 한국 핸드폰을 켰다. 일단, 멀라이언 상의 사진을 하나 찍었다. 해외에서 보내는 멀티 메시지가 얼마였더라....... 하는 생각을 잠시하고, 나는 사진을 첨부하여 아버지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아빠. 저예요. 먼저 연락도 못하고 와서 죄송합니다. 전 지금 싱가포르입니다. 한 달 뒤에 봐요.]




 문자가 가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빠의 번호다. 나는 통화거절 버튼을 누른다. 뭐라고 할 말도 없었고, 이런 저런 자초지정을 설명하려니 비싼 국제통화료가 겁도 났다. 그러자 바로 문자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얼른 메시지 확인을 했다.




 [너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니? 이게 벌써 몇 번째냐. 넌 대체 얼마나 더 놀아야 정신을 차리겠니......]




 아빠가 이렇게까지 화가 났을 줄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핸드폰을 쥐고 있었다. 몇 분 뒤 다시 메시지를 알리는 짧은 벨소리.

 

 [나는 너 때문에 진짜 죽고 싶다.......]




 아버지를 죽고 싶게 만드는 딸. 내가 대체 무슨 잘못을 하여 나의 아버지를 죽고 싶게 만든 걸까. 나의 행복이 아버지에게는 불행이 되는 걸까? 부모님의 권유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무런 성취감 없이 일을 하고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적금을 들고 보험을 들고, 시집을 가는 것보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인데...... 나는 양쪽 관자놀이를 누르고 한참을 생각 해봐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나 때문에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자 나야말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여기 저기 관광객들의 반짝이는 플래쉬를 뒤로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택시를 잡았다.



"Take me to the Hotel Marina Oriental, please."



 그리고 몇 분 후, 도착한 호텔 로비에서, 나는 Y에게 문자 메시지를 남겼다.




 [지금 만다린 호텔 로비에 와 있어요.]




 Y라는 남자는, 몇 달 전 어느 모임 자리에서 만나, 그 뒤 두 번 정도 저녁을 같이 먹은 적이 있던 남자였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나보다 5살 위라는 것. 건축 사무실에서 일한다는 것. 그리고 이틀 전 출장 때문에 이 호텔에 와 있었다는 것. 아, 그리고 나와 유일한 공통점은, 윤대녕의 소설을 좋아하는 것. 그래서 서로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잠시 후 남자의 전화가 왔다. 오늘이 출장 마지막 날이라 조금 바빴고, 곧 호텔로 돌아가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사실, 남자는 이틀 전 싱가포르에 도착했을 때부터 이 곳 호텔에서 보는 야경이 너무 아름다워 잠들기가 아깝다는 문자를 보내왔었다. 나 역시 남자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사실 여기에서까지 만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저도 모르게 평생 동안 각인되어 버리는 일이라 신중해야만 한다. 평생 동안을 뉴스에서, 혹은 신문이나 어느 여행 책에서 그 낯선 나라의 이름이 나오면 자연스럽게 그 나라의 공기와 냄새와 함께 그 사람이 떠올라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도 평생.




 몇 분 쯤 흘렀을까. 휴대폰의 버튼만 의미 없이 누르고 있을 때, 그가 왔다. 한 손에는 서류 가방, 다른 한 손에는 지갑. 택시에서 바로 내려 지갑을 주머니에 넣을 틈도 없이 로비로 온 듯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낯선 도시, 낯선 언어들 사이에서 익숙한 얼굴을 만난다는 것은.




"많이 기다렸죠? 미안해요."




 시계를 보니 거의 1시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아빠에겐 답장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호텔 라운지에서 가볍게 칵테일이나 한 잔 할까? 하고 물었지만 나는 곧장 방으로 가자고 했다. 남자의 방은 21층이었다. 커다란 창으로 보이는 싱가포르의 야경은 남자의 말대로 정말 그냥 잠들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남자는 테이블에 서류가방과 지갑, 그리고 메고 있던 얇은 타이를 풀고 냉장고 안에 있던 탄산수를 꺼냈다. 와인 잔 밖에 없다며 둥글게 입을 벌린 와인 잔에 탄산수를 따라준다.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과일 바구니에 있던 포도를 하나 먹고 남자가 준 물을 마시니, 신기하게도 스파클링 와인 맛이 났다.
 


 




 "우와, 근데 저기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말이예요. 정말 멋있는 것 같아요."

나는 창가에 다가가서 커다란 배 하나를 머리에 이고 있는 반짝이는 건물을 보며 말했다.

"멋있죠? 저 건물. 근데 저거 한국 회사가 지은 거 알아요? 친한 선배가 다니는 회산데, 이젠 멀라이언상보다 저게 더 유명하다고 어찌나 뿌듯해 하는지."

"근데, 저 호텔 때문에 다른 호텔들은 다 굶어 죽겠다."

"글쎄, 근데 사실 저 호텔에 있음 저 야경을 못 보는 거잖아요. 그래서 다른 호텔들 방값이 더 비싸졌다는 말이 있어요."

라고 말하면서 남자가 웃는다. 이제 보니 선한 웃음을 가졌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슬리퍼를 벗고 창문의 틀에 올라섰다. 그리고 양 손바닥을 창문에 짚고는 이마를 창문에 붙여 아래를 내려다봤다.

"혹시, 도쿄 데카당스라는 영화 알아요?"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라카미 류 라고, 제가 아빠보다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만든 영화예요. 근데 그게 좀 야한데, 어떤 남자가 도쿄에 최고급 호텔에서 콜걸을 불러요. 근데 남자는 지독한 S 였어요. S알죠? 사디스트. 남자는 그 콜걸에게 이렇게 창문에 붙어서 엉덩이를 돌리고 있으라고 시켜요. 하루 종일. 여자는 괴로워하면서 천천히 엉덩이를 돌리고 있는데 땀이며, 눈물이......"

남자는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나도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저 가짜 스파클링 와인에 취해 버린 걸까?

"근데,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야했어요. 오히려 일반적인 섹스 장면 보다 더. 근데 그 도쿄의 큰 창이 있는 호텔이랑 지금 이 호텔이랑 닮았어요. 싱가포르의 야경은 그때 그 여자주인공을 닮은 것 같아요. 야한 화장을 한 콜걸 같아. 아름답지만 다 거짓말 같아서 쓸쓸해 보여요."

남자가 옆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네요. 싱가포르엔 별을 찾는 게 진짜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거 알아요? 별 보다 야경이 더 빛나서 별을 찾기가 힘들대요."

남자의 말을 듣고서, 열 번째 밤 만에 처음으로 싱가포르의 하늘을 봤다. 저기 저, 희미한 점들이 별인 걸까? 눈은 어느새 화려하게 반짝이는 야경에 익숙해져 버려 정작 진짜 별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싱가포르 같은 부자 나라는, 인공별도 만들어서 하늘에 뿌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든 돈만 있으면 못할게 없는 세상이야. 아무런 고민도 없이, 별도 만들어 뿌리고, 달콤한 사랑도 사고......"

그리곤 나는 몇 모금의 탄산수를 더 마시고는 호텔 바닥에 개처럼 엎드려 남자와 섹스를 했다. 자정을 넘겨도, 창밖의 야경은 여전했다. 우리 역시 소파에서 한 번 더 섹스, 그리고 다시 넓고 푹신한 침대에서 한 번 더.





 



  

새벽 3시가 넘었을 때, 남자는 먼저 잠이 들었다. 나는 쉽게 잠이 들지 않아 하나 둘 불이 꺼지는 빌딩들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부터 섹스를 하는 것보다, 누구와 함께 잠을 잔다는 게 더 어려워져 버렸다. 생각해 보니 2번 섹스를 했다고 해서 2번 밥을 먹은 사이보다 더 가깝다고 할 수 없었다. 멍하니 천정을 보다 불쑥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까 남자를 기다리면서도 결국 답장하지 못했던 아빠에게 보낼 문자 메시지를 위해 핸드폰을 잡고 누웠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액정의 커서도 무거운 내 눈꺼풀과 함께 힘겹게 깜박인다.



 어느 덧, 새벽 5시가 넘은 시간. 나는 한 숨도 자지 못했고 역시나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남자의 목 아래까지 이불을 끌어올려 주고는 잠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오늘 일로 우리는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을까? 혹시 아침에 눈을 뜨면 더 어색해져 버리려나? 무방비 상태로 살짝 벌어진 남자의 입술은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조용히 창가의 책상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남자의 노트북과 다이어리, 그리고 윤대녕의 소설집이 있었다. 나도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던가? 하며 책장을 뒤적이다 무심결에 남자의 다이어리에 손이 갔다. 심플한 갈색 가죽 다이어리, 여기저기 스케치와 바쁜 글씨들. 그러다 우연히 본 월간 일정표에는 남자의 출장날짜에 체크가 되어 있고, 내 이름과 가서 연락할 것. 꼭! 이라는 글씨가 있었다. 




 창 밖은 어느새 천천히 동이 터오르고 있었다. 나는 남자 다이어리의 뒷 페이지를 한 장 찢어서 간단한 메모를 남기고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왔다.  



 [서울에서 봐요. 꼭! ]



 이른 아침의 호텔 로비는 알 수 없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프런트의 어느 직원에게 시티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하냐고 묻는 내게 콜택시 서비스를 해주겠다는 친절을 보였지만, 나는 그의 친절에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해가 일어 선다. 지난 밤 싱가포르강과 함께 아름다운 야경을 뽐내는 건물들도, 이제는 짙고 화려한 화장을 지운 채 모두가 헐벗은 맨 얼굴로 수줍게 서있다. 나는 5성급 호텔을 등지고 근처 MRT역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웬일인지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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