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실의 작은 모니터로 너의 모습을 확인 했을 때 나는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어떻게 알고 왔던 거지? 여기를 알 리가 없잖아.' 거듭 생각을 해봐도 그럴 만한 일이 없었다. 내가 집을 알려 준 적도 없고, 사실 우리는 몇 번 만난 적도 없었다.

 

그런데 너는 아주 자연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가 사는 11층에 내려 그런 일을 하고 다시 돌아가다니. 나는 놀라고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모니터 아래의 숫자는 새벽 2시를 알리고 있었다. 회색 점퍼, 눌러 쓴 캡모자. 

 

 

 그 일은 거의 두 달전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밤 자정에서 아침 6시 사이. 현관문을 두드리던 두 번의 노크. 정말로 단 두 번. 그리고 정적. 넌 나에게 무엇을 원했던거지? 아니면 어떤 암시? 암호? 그런데 그런걸 나한테 매일 밤 전할 만큼  우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잖아.

 

 

몇 번의 섹스. 한 번의 피크닉. 그렇다면 먼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피크닉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장소는 한강. 우린 각자의 자전거를 끌며 걷고 있었다. 햇볕이 따가운 날이었다. 4월쯤? 주말이 아니라 그다지 붐비지 않았던 강변.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그다지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역시나 특별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다이소의 몇 천 원짜리 와인잔은 생각보다 꽤 쓸만하다는 이야기. 굳이 너가 아니어도 할 수 있고, 내가 아니어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했다. 나무 그늘을 찾아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갔고 근처의 세븐 일레븐에서 샀던 오렌지 쥬스를 마셨고 컵라면을 먹을까? 했지만 그건 관두기로 하고 얼마간 앉았다가 다시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너도 그때 이미 알고 있었겠지. 그때 그 자리에 네가 아닌 누군가가 있었더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을. 대낮 한강 데이트같은 일들은 흔하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데이트는 우리가 서로에게 그다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받을 뿐이었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이제라도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었나?

 

 

말이 없는 편이던 너는 내가 묻는 질문에 어쩔 수 없는 대답을 하고, 간혹 너의 사진 작업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사진은 진짜 좋아서 하는 일이야?" 라는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때는 너는 조금 웃었나? 나는 다시 직장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고 네가 묻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 어딘가에 출근을 하는 일이 너무 싫다고 인상을 찌푸렸다.

 

 

몇 번의 섹스(아마도 3번 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한다. 역시나 별다른 점이 없다. 미혼의 남녀 둘이 몇 번의 데이트를 하고 술을 마시다가 근처의 모텔로 들어가서 섹스를 한다. 뒷날 정오에 가까운 시간 모텔을 나와 햇볕에 눈을 찡그리며 그 앞 국밥집으로 들어간다는 스토리에 그와 나를 대입시키면 된다. 그랬다. 너는 그저그런 남자였고 나 역시 너에게 그저그런 여자였을 것이다. 운명같은 만남도 없었고 인연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대단한 우연도 없었다. 그렇게 몇 번 만난 뒤 우리는 어느 순간 연락이 뜸해지게 되었고 나는 너를 잊고 있었다. 그런 네가 감시카메라에 잡히니 나는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네가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건 세 달전 쯤 새벽이었다고 했다. 나는 먼저 알아차리진 못했다. 그때쯤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정 이후의 시간은 죽어있는 시간과 같았다. 직장은 언제나 나를 지치게 만든다. 일을 시작하고는 잠자는 시간마저 일의 연장이었다. 푹 잠을 자지 못하면 다음 날이 괴로웠다. 출근은 이렇게 내가 가장 사랑했던 잠자는 시간마저 내 것이 아니게 만든다. 그 소리를 먼저 들은 건 앞 집1101호 여자였다. 어느 휴일 오전 앞 집 여자가 초인종을 눌러 며칠 전부터 새벽마다 누군가가 우리집에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두드리는 시간이 일정치 않고 뭔가 소리가 들려 확인 창으로 확인을 해봐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리는 일정하게 두 번의 노크라는 것. 그 얘기를 듣고부터는 나 역시 새벽마다 잠을 잘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첫째로 무서웠다. 이제껏 내가 상처 줬던 사람들을 다 떠올려 봤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깜박 졸다가 악몽을 꾼 적도 많았다.

 

어느 날은 새벽 1시. 그리고 그 뒷날은 새벽 4시. 처음에는 노트에 시간을 적어서 어떠한 행동에 공통점을 찾아 의미를 찾으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간에는 어떠한 규칙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어느 날은 용기를 내서 현관문 구멍에 눈을 뜨고 몇시간 동안 지켜 본적도 있다. 하지만 역시 무서워져 그냥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어떤 날은 전혀 찾아 오지 않을 때도 있었다.

 

이런 밤들이 반복되다 보니 직장생황이 순탄할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결국 입사한 지 두 달만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직장을 그만 두고 새벽에 깨어 있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상하게 그 노크 소리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안심이 되었지만, 어느 순간에는 좀 서운한 감도 없지 않았다. 그 즈음엔 다른 남자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한 남자와 순조롭게 연애를 하고 새벽에는 조용히 일기를 쓰며 다시 안정을 찾기 시작했을 때 다시 그 새벽의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예전보다 조금 더 쎄진 듯한 두드림. 다시 매일 빠지지 않고 찾아왔다. 시간대도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로 좁혀졌다. 이제는 정말 그 시간대에 현관문 확인 구멍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누군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그 방법은 너무 무섭다.

 

그러다 오늘 오전.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출근 길이던 앞집여자와 한 엘리베이터에 탔다. 앞집여자는 요즘에도 누군가 노크를 하는 것 같던데 경찰에 알리는 것이 어떻냐고 했다. 맞아. 앞 집 여자는 또 무슨 죄람. 이제 뭔가 조치를 취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쓰레기를 버리고 찾아 간 곳이 경비실이었다. 나는 경비실 아저씨에게 CCTV를 확인할 수 있냐고 했다. 처음에는 경찰에 신고를 하는 것이 먼저 인가? 라고 생각했고, 또 일반인이 이렇게 CCTV 녹화 분을 바로 확인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생각보다 너무 쉽게 확인이 되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경비아저씨의 눈이 경비복 가슴 주머니에 은색 호루라기처럼 반짝인다.

 

'이렇게 쉬울 줄 알았으면 진작 알아볼걸.' 이란 생각을 했을 때, 경비 아저씨는 어제 새벽 2시경의 CCTV를 플레이 해주었다. 회색 점퍼를 입고 캡모자를 푹 눌러쓰고 왼손에 가방을 들고 아파트 입구를 걸어가는 남자. 이것은 아파트 입구의 CCTV에 잡힌 모습이다. 이렇게 봐서 그런지 남자의 걸음걸이는 누가봐도 이 아파트 주민의 걸음걸이가 아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 안에 잡힌 남자의 모습. 그리고 역시나 내가 사는 1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그 행동을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찰나 다시 엘리베이터 속으로 들어왔다. 군더더기가 없고 날렵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경비실을 지나 사라졌다.

 

 

놀랐지만 오랜만에 보는 남자의 모습에 괜시리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나도 이상하다. 어찌보면 귀찮고 반복적이면서도 소용없는 짓을 하는 그가 안쓰럽기까지 했다. 내가 몇 번 봤던 그 남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를 정말 괴롭히고 싶었다면 차라리 더 지속적으로 문을 여러번 두드린다던가, 아니면 분뇨를 집 앞에 둔다거나, 또 아니면 차라리 집을 나가는 나에게 해코지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남자는 스스로 귀찮을 수 있는 이런 짓을 하는 것이지?

 

마음씨 좋은 경비 아저씨는 이 녹화 비디오를 토대로 경찰에게 신고를 하라고 추천해 주셨지만 나는 일단 알겠다고 대답만 하고는 경찰 신고는 하지 않기로 한다. 경비실을 나와서 쓰레기를 버리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2주전부터는 빠짐없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으니, 아마 오늘 역시 그는 올 것이다. 일단 나는 식탁 옆 벽에 걸려진 달력 중 다음 달 달력을 한 장 찢었다. 그리고 검은 유성펜으로 크게 글자를 썼다. 그리고는 새벽2시가 되면 이것을 현관문에 붙일 생각이었다. 이 방법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은 열려 있어요. 들어 오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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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창 글쓰는 연습을 할 때 썼던 글이다.(2012년 봄?) 매일 일정한 시간에 샤워를 하고 몸과 마음을 비우고 자리에 앉아 10분동안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마구 나열하는 방법. 그리고 그 다음 주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들을 마구 나열하였는데 이 이야기가 나왔다. 보통 한 단락 완성하는데도 몇 시간씩 걸리는 내가 10분만에 이런 이야기를 쓰다니!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당시 섹스칼럼 쓰는 밤비와 그 외 글쓰는 친구들과 함께 했던 방법이었는데 나의 게으름으로 스터디는 깨졌다. (그들은 지금도 하고 있나 모르겠다.) 내년엔 다시 글쓰는 연습을 시작할 예정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가장 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일은 글쓰기가 유일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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