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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한달 간의 여행이 나에게 남긴 것은 과연 무엇일까?

석장의 일기와 약간의 사진. 그리고..

어쨌든 가장 확실한 것 한가지는 엄마에게 갚아야 할 빚이 200만원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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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장의 일기. 2G 메모리칩에 갇힌 몇장의 사진.

추억이라 부르기엔 민망한 몇 가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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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상상 속의 나는 아주 우아한 귀족이 되기도 하고, 어느 기업의 카리스마 넘치는 사장님이 되기도 한다. 한국의 전도유망한 여류작가가 되어 유럽을 순회하며 강의를 하기도 하고, 뭐 또 한편으로는 그냥 동네 약국의 접수원이 되어 보기도 한다. 작은 빵가게 사장님이 되어 보기도 한다. 내 상상 속에서 나는 자유자재 변신의 귀재다.

 

요즘 같이 밖이 추운 겨울엔 집에 누워 천정을 보며 상상을 하는 일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일이다.

특히나 요즘같이 지갑 속이 텅텅 빈 날에는.

 

 

 

 

 

2011.12.14   4:23am

 

 

 

 

 

내일은 엄마한테 전화를 해서

나를 배 안에 넣고 있을 때 어떤 꿈을 꿨는지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후엔 전혜린 평전을 다시 읽고 밤에는 누군가에게 술을 따르러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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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나이의 엄마의 뱃 속엔 내가 있었다. 나의 태몽은 엄마가 감나무 아래서 주홍빛 감을 치마폭에 주워 담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일 중 유독 감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건 조금 이상하다. 하지만 태몽이 그렇다하니 나는 때때로 내가 아직 떫은 맛을 내는 덜 익은 감 같다는 생각을 한다.

내 꿈은 어서 빨리 속이 꽉 찬 홍시가 되어 단단한 씨까지 그렇게 녹여버리고, 금방이라도 뚫릴 것같은 얇은 껍질 안에서 위험하면서도 편안하게 익어가고 싶다. 그러다 좋은 날 바람을 맞으면 아무런 저항도 미련도 없이 그저 툭 하고 뛰어내릴 수 있는 그런 홍시가 되고 싶다. 그곳이 진창이든 색이 좋은 낙엽 위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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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의심과 집착으로 커져 나간다면

그건

사랑이 얕아서 일까 아니면 반대로

사랑이 깊어져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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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계절만에

가장 활짝 웃는 모습과

가장 처연히 울던 모습과

가장 불 같이 화를 내는 모습을 다 보여줬다면

나는 그 남자에게 마음을 다 줬던 것일까. 아니면,

그 남자의 마음을 다 받았던 것일까.

 

 

 

 

 

 

2011.01.06 04:00pm

 

 

 

 

 

 

누군가가 나를 보고 섹스'에 관한 이야기로 인기를 끈다고 했다. 관심 받고 싶어 죽겠나 보군. 이라고도 했고.

사실 나는 인기도 관심도 별 필요 없는데

섹스라는 단어를 말했다고 해서 인기과 관심을 끌 수 있다는 자체가 나는 조금 신기할 뿐이다.

 

결혼한 사람들은 밥 먹듯 하는 것이 섹스고,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듯 돈을 주고 사는 게 섹스인데,

섹스.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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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봤던 나는 완전한 내가 아니야.

지난 주에 네가 만났던 나 역시 사실 내가 아니야.

나도 나를 30년이나 봐 왔지만,

나도 나를 잘 모르겠다.

30년동안 그렇게 거울을 달고 살았지만 말이야.

 

2011.01.04

 

 

 

 

 

 

싸이월드 사진첩엔 방콕의 오성급 호텔 방에서 하이힐을 신고, 등이 훤히 파진 원피스를 입은

짙은 화장에 컬이 들어간 머리결을 만지며 미소 짓고 있는 내가 보인다.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은 생각하겠지?

팔자 좋은 년. 대체 일 년에 몇 번을 비행기를 타는 거지? 돈이 그렇게 많나?

 

하지만 모르겠지. 이 노트를 보지 않는 이상.

 

 

 

저 때, 나의 친구들이 방콕의 그 호텔로 오기 전까지.

나 혼자 땡볕을 걸으며, 구겨진 바트를 세고 또 세고.

결국 큰 맘을 먹고 35바트 쌀국수를 오래 씹어 먹고.

호텔로 가는 가장 저렴하다는 콩나물 시루만큼이나 빡빡하게 사람들을 태운 수상버스에서 배멀미를 참으며.

친구의 이름을 대고 배가 고파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호텔 방 안 유일한 무료 커피를 연달아 마시며.

어디 나갈 돈도 궁금한 장소도 없던 한심한 여행자였던 내가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 누군가를 억지로 기억해내어 편지를 쓰고 있었던 나를 어떻게 상상이나 할런지.

 

보이는 것은 어차피 껍질. 가면.

 

 

 

 

 

 

 

2011년 겨울, 새벽의 일기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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