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가 처음 출근한 날,  삼성동 어느 뷔페에서 직장 전체 회식이 있었다. 우리는 그녀가 어색해서 편하게 식사를 하지 못할까 싶어 자주 말을 걸었다. 내가 "남자 친구 있어요?"라고 묻자 "아니요. 몇 년 전에 7 년 동안 만났던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는 잘 안 되더라구요." 라고 했다. 다들 우와, 7년이라니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하고 있는데 Y가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했다. "그땐 정말 사랑했거든요." 별생각 없이 초밥을 입에 넣고 있던 나는 "정말 사랑했다."는 이 한 문장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 시각. 영국의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포착하여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것이다. 일본의 누군가는 방 안을 기어다니는 아기를 주시하며 분유를 타고 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누군가는 형제들과 한 방에서 다른 꿈을 꾸며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 안에서 이어폰을 꽂은 채 졸고 있을 한국의 누군가도. 렌트카로 그레이트 오션 로드를 달리고 있을 중국의 가족 여행자도.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을 써보겠다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프랑스의 소년도.

지금 이 풍경들은 이들이 죽고난 후에도 다른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서 똑같이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은 10년 전 누군가가 했던 일이고 10년 후에도 누군가에 의해 이어지고 있을 일.

아, 지겨워라. 맛도 없이 질긴 삶.

책을 볼 때, 음악이 있으면 집중이 어렵다. 시간이 나면 주로 책을 보는 편이라 음악을 듣는(감상) 일이 드물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가수도 없고,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도 없다. 그런데 호주에 와선 책 보다 음악을 더 듣는 것 같다. 일단 한국에서 가져 온 책이 많지 않고, 얼마 전 스피커를 산 것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음악에 대해 아는 것은 정말 없지만, (정말 없어서) 요즘에는 클래식을 듣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유투브에 들어가 모짜르트 클라리넷 협주곡(아웃 오브 아프리카 OST)을 듣는다. 집에 돌아 오면 베토벤 교향곡이나 피아노곡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면서 위키백과로 클래식 음악가들에 대해 검색도 해 본다.(물론 대부분이 죽은 사람들이다.)

얼마 전, 백건우씨가 섬마을 음악회에서 비창 2악장 피아노 연주를 하는 동영상을 보았는데, 배경이 바닷가로 정말 근사했다. 그곳이 어디인 지 검색을 해 보진 않았지만, 남해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 문득, 남해에서 울산으로 전학을 왔던 초등학교 5학년 때가 생각났다. 한 학년에 한 학급밖에 없었던 미조국민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13개 반이 있었던 울산 신정국민학교. 그때 학교에서 단체로 울산시 교향악단?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문화 센터에 갔다. 방과 후에 매일 뗏목을 타고 장화 신은 뱃사람을 보던 나로서는 검은 정장을 입은 어른들이 진지하게 악기를 연주를 하는 모습이 굉장히 충격이었다. 친구들은 눅눅한 벨벳 시트 의자에서 엉덩이를 들썩이고 지겹다고 까불고 했지만, 나는 오케스트라의 첫 곡을 듣고 너무 감동을 받아 눈물이 찔끔 흘리기까지 했다. (물론 옆 아이에게 들키지 않게 잘 참아냈지만) 생각해 보니 클래식에 얽힌 귀여운 추억인 것 같다. 마치 세탁 종료를 알리는 알림음이 슈베르트 '숭어'인 우리집 세탁기 만큼이나 귀엽다.   







백건우/ 섬마을 음악회/ 베토벤 비창 2악장 http://youtu.be/eW9WIQpcXh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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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설 ‘가시나무 새’ ㅡ 그런 시절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베네치아를 자판을 두드려 지켜내던 한메 타자만이 유일한 오락이던 시절. 멍울진 가슴과 함께 핑크빛 호기심이 커져가던 때였다. 누군가는 부모님 방 옷장 속에서 이상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고 알려 주었다. 어떤 아이는 옆 학교 남고 오빠의 단단한 그곳을 만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비디오도 아는 남고 오빠도 없던 나는 조용히 초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네살, 중학교 1학년 때 였다. 지난달 초경을 시작한 친구가 말하길 빨간색 물건을 가까이하면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진작에 써 보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즈음 같은 무리에서 생리가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조급해진 나는 생리대를 미리 하고 잤더니 초경을 시작했다는 한 아이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안방에 몰래 들어가 생리대 하나를 꺼내고 안방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누웠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언젠가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여류 소설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여주인공의 첫 경험 장면이 두 면에 걸쳐 나온다. [돌처럼 단단한 것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문장을 곱씹으며 한 쪽 손으로 남자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생리대가 부스럭 소리를 내고 조용히 회전하고 있던 선풍기 바람은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알았다. 컴퓨터 오락이나 소설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른들의 유희를.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정말 여자가 되었다.


 

2. 창문에 미끄러지던 손 ‘타이타닉’ ㅡ 모두가 금을 모으던 시절도 있었다. “I am F.”라는 씁쓸한 유행어가 전국에 퍼지던 때였다. 아빠는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이 없어졌고 엄마는 급한 대로 집 안의 금붙이들을 모아 팔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빠는 결국 택시 핸들을 잡았고 엄마는 집이 아닌 곳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내 주변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디카프리오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었다. 처음 가 본 극장의 대형 스크린. 그 안에는 어쩌면 내 인생에선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을 화려한 크루즈 여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입김으로 가득한 차 안,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사랑을 나누던 장면. 그 절정의 순간 습기 가득한 창문을 치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던 손바닥. 어떠한 몸짓 보다 더욱 함축적이었던 그 장면. 디카프리오 팬이었던 친구는 그 장면에서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극장을 나온 후로 줄곧 그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생각했다. 남자와의 섹스는 어떤 느낌일까? 등굣길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학생의 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두 해 뒤 드디어 그것을 경험했다.


3. 첫 남자는 베이시스트였죠ㅡ 내 나이 열여덟. 그는 밴드부 베이시스트였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첫 경험. 아쉽게도 창문에 스르르 미끄러지는 손바닥처럼 강렬한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서툴렀고 섹스 후의 관계도 어색해졌다. 베이시스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그러다 재미 삼아 쓴 글 하나로 섹스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당신이 해 본 최고의 섹스는 무엇인가요?” 이 일을 하고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한결같이 “깊은 사랑과 함께 하는 섹스가 가장 멋진 섹스입니다.”라고 답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답이 바로 여자 섹스 칼럼니스트의 한계라고 말했다. 사소한 떨림, 금지된 선을 넘는 스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즐기는 파격. 하지만 이 모든 몸짓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 더욱 깊어진다는 것임을. 신음을 서로 연기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눈빛까지 연출하는 것은 어렵다. 순간의 쾌락 뒤에 오는 허무를 채워 주는 사랑의 눈빛.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이제껏 겪었던 모든 관계는 이 순간을 위한 베이스였다는 것을 내 나이 서른, 한 남자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SEP.2014/COSMOPOLITAN_내 섹스 라이프의 터닝 포인트(책,영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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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 어찌보면 남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더 쉽고 편한 것 같다.

아빠가 원하는 대로라면 매달 300만원 정도의 월급을 꼬박꼬박 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일테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라면 열린 사고의 따뜻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것은 뭘까? 남들은 내가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사실 그것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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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를 그만둔 지 꼭 한달이 되었다. 나는 울산에도 다녀오고 이것저것 구상을 하면서 기운을 내고 있다. 사실 어느 순간부터 글 쓰는 일에 흥미가 떨어졌다. 내가 유일하게 욕심을 냈던 것이 바로 글쓰기인데 과연 이상한 일이다. 글을 쓰려고 해도 아는 것 보단 모르는 것이 많은 것 같아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진다. 게다가 멋진 말들은 이미 마크 트웨인이나 헤밍웨이같은 사람들이 다 해버렸지 않나. 애인은 아직도 우울과 권태에 빠져있다. 나도 덩달아 우울해진다. 사실 나도 책을 내고 싶다는 평생 소원을 작년에 이루었지만 이상하게 허망한 마음이 크다. 책을 냈지만, 먹고 쓰는 돈은 다 치과에서 벌어야 했으니 상심이 컸던 것 같다. 덕분에 늘 책에서만 봤던 권태감이라는 단어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이번에 울산에 다녀오지 않았다면 권태감은 계속 깊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울산에서 만난 가족과 친구들, 특히 지난 달 1살 생일을 맞은 조카 지우를 보니 다시 욕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에게 좋은 에너지가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단순하지만 지우에게 멋있는 이모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지우가 모락모락 커 나갈 때마다 그 옆에서 "지우야.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그거 믿을 필요 없어. 네가 생각하고, 네가 믿는 것들 그게 정답이야." 라고 말해주려면 지우 옆에 언제나 즐겁게 살아 있어야 한다. 물론 어떤 인생도 매일이 즐거울 순 없다. 하지만 나는 지우에게 이모는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고. "인생이라는 커다란 벽지에 멋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며 그래서 이렇게 멋지게 살고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글을 쓴다는 것이 내겐 어떤 의미인지, 하루를 산다는 것이 내겐 어떤 의미인지 나는 이렇게 꾸준히 쓰며, 살며 찾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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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앞에 두고 나는 우울해졌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가고 싶은 곳도 없고 사실 갈 데도 없다. 3년이라는 시간동안 너와 내가 한 것은 서로를 집요하게 사랑한 일밖에 없는데 이제 우리는 탄성을 잃은 고무줄 마냥 늘어져 있다.

 

 

'남들 욕만 하다가 내가 병신이 되어 버렸다.' '나는 3년 동안 아무 것도 못 했잖아.' '아무 것도 하기가 싫고 그냥 죽고만 싶다.' 하며 고개를 돌리고 우는 너를 어떻게 해야하나.

 

 

우리의 그 집요했던 사랑에 대해서. 그러다 결국 우리를 지쳐버리게 한 그 거대한 것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 쓴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 말고는 그것에 의미를 둘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랑을 했느냐 보다 너와 내가 뱀처럼 엉켜 섹스를 한 것에 관심을 가지겠지. 애니팡이 터지는 소리와 쉴새없이 액정을 두드리는 사람들틈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겠다고 결심하는 현실이 더욱 소설같은 일이 되어버렸다. 낭만 없는 사회, 결국 우리도 이렇게 그 사회에 한몫하게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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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산부인과에서 마지막 치료를 받고 형제유통에 들렀다. 이곳은 마트나 백화점에 납품을 하는 젓갈집이다. 소매가 아닌 도매상이라 대단한 간판도 없고 근사한 진열대도 없다. 그저 유리문에 [젓갈 팝니다]라는 흘려 쓴 글씨가 있을 뿐이다. 그 문을 열면 인테리어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바닥에 대형 냉장고가 있고 그 안에 명란젓, 굴젓 같은 10여 가지 젓갈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집의 낙지젓을 제일 좋아한다. 대형 마트 3배 크기의 용기에 담긴 맛있는 이 낙지젓은 단돈 8000원. 이 한통만 있으면 보름 정도는 반찬 걱정이 없다. 참, 대신 신용카드는 안 받는다. 평소 지갑없이 신용카드 한장만 달랑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도 그래서 몇 번 발걸음을 돌렸던 적이 있다. 오늘은 다행히 주머니에 만원짜리가 있어 기쁜 마음으로 그놈을 사고 까만 봉지에 넣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행복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나오면서 이제 사당동을 떠나면 이것들과 다 안녕이겠다싶어 불쑥 마음이 흔들렸다.

 

 늘 야외 스피커로 라디오를 틀어 놓아 나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던 집 앞 치킨 파티. 맛이나 가격을 따져봐도 그집엔 왜 늘 그렇게 손님이 많은건지는 아무리봐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늘 묵묵히 점포 앞 커다란 가마솥에 건강한 소뼈를 삶고 있는 맞은편 소머리 국밥집은 왜 늘 조용한 걸까? 과일 좋아하는 나만 보면 표정이 밝아지는 행복마트 목청 좋은 청과물 아저씨도 이곳을 떠나면 안녕이다. 꼬깃꼬깃한 배추잎 33장을 건네며 "꼭 작가가 될 수 있게 기도하면서 만들어달라"던 내 말을 농으로 듣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시던 행복한 나무 세상 사장님. 그 책상에 앉아 글을 쓴 덕분인지 부족해도 작가 그 비슷한 타이틀로 살아가고 있다. 일요일 밤이면 늘 편의점 골목에 트럭을 대고 장사를 하는 새우 튀김 아저씨. 정해진 날 없이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 10번 출구 앞 한치 아저씨도 이곳을 떠나면 모두 못 볼 얼굴들이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낮과 밤, 안과 밖할 것 없이 소란스러웠던 우리 집. 여자 나이 서른이면 시집 가서 아파트 사는 게 정답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서른엔 삐뚜름한 방 2칸 좁은 거실에서 여자 셋이 모여 살았다. 남들 시선도 상관 없고, 무서운 것도 없던 그때. 좁고 불편한 터에서 많이 웃고 떠들었다. 나라의 제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마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 사당동. 사람들이 모이고, 타악하며 굿을 하던 곳이라서 그런지 이 동네는 아직도 골목 곳곳에 작은 극단이나 합주실이 제법 있다. 당장 우리 집의 양 옆으로 연기 연습실과 기타학원이 있다. 물론 이것들 역시 내 창밖 소음에 일조한다.

 

 

 이곳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세 명이 모여 사는 집은 항상 분주했고, 그 좁은 공간에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내 침대에서 잠을 잤던 몇명의 남자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남자와 오래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글을 쓰겠다고 서울로 와서 영등포에 혼자 방을 잡았을 땐 아무것도 쓰지 못해 누웠던 날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작두 위의 무녀처럼 자판을 두드렸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뭔가에 그렇게 뭔가에 집중하며 열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나를 이곳으로 불러 준 룸메이트 수련의 응원과 도움의 힘이 컸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서울에선 그 사람이 사는 동네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낮과 밤도 없이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 맛집 골목을 끝으로 이어지는 재래 시장 때문에도 이곳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1년 365일 소란하고 복잡하고 불안정한 이 환경과 나는 닮아 있었다. 교통의 요지답게 이 사람, 저 사람이 다녀갔다. 그것은 편리할 때도 있었고 때론 나를 괴롭게 했다. 싸고 푸짐한 맛집 골목답게 결국 이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밥벌이는 했다. 창문을 뚫고 파고드는 고질적인 거리의 소음은 적당한 스트레스가 되어 주었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이 동네는 내 본질과 딱 맞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애인이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만족스러운 섹스를 끝내고 나란히 누웠을 때다. 발 아래로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애인은 이곳이 태국의 게스트하우스같다 말했다. 나 역시 이곳이 뒤라스의 소설 '연인' 중 콜랑의 독신자 방같단 생각을 자주 했다. 어린 백인 소녀와 허약한 중국인 갑부가 창밖의 소음과 함께 몸을 섞던 덥고 어두운 방. 주말 밤이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소음때문에 결국 우리가 더 큰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한 적도 있었다. 최승자의 시를 서로에게 읽어주던 밤도 있었다. 겨울에 함께 껴안고 있으면 전기장판이 없어도 따뜻했다. 물론 서로를 저주하며 크게 싸웠던 날도 있었다. 그 사람을 잊기 위해 사랑한 만큼 증오를 하던 밤도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행자처럼 용감했고, 소설 속 연인처럼 깊었다.

 

 사당동을 떠난다면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은 지난 밤 꿈처럼 희미해지겠지만, 끝내 떨칠 수 없는 것들은 이미 깊이 각인 되어 있다. 놓치기 싫어 떠오르는 대로 급히 노트에 적어 남겨 둔 것도 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함께 미래를 나눌 것이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확실한 계획은 아직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사당동을 떠난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대로 곧 어디론가 거처를 옮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내가 그러했듯 그에따라 나는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엔 책상에 앉아 남자 누나의 미니홈피에 들어간다. 

 

 

그곳의 '가족' 폴더에는 나를 알기 전 남자가 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힙합 셔츠를 입고 길거리 무대 위에 서 있는 남자. 

추석 날 친척들과 함께 거실에 어정쩡하게 앉아 있는 모습도 있다.

볶음면처럼 과감한 헤어스타일로 누나와 함께 미술관을 가기도 했다.

 

 

나라는 여자를 알기 전 남자의 모습은 어쩐지 우울해 보이기도 하고

어쩌면 더 행복해 보이기도 한다.

 





 


 어떤 밤 - 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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