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설 ‘가시나무 새’ ㅡ 그런 시절이었다. 물에 가라앉는 베네치아를 자판을 두드려 지켜내던 한메 타자만이 유일한 오락이던 시절. 멍울진 가슴과 함께 핑크빛 호기심이 커져가던 때였다. 누군가는 부모님 방 옷장 속에서 이상한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고 알려 주었다. 어떤 아이는 옆 학교 남고 오빠의 단단한 그곳을 만져 본 적도 있다고 했다.  비디오도 아는 남고 오빠도 없던 나는 조용히 초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 네살, 중학교 1학년 때 였다. 지난달 초경을 시작한 친구가 말하길 빨간색 물건을 가까이하면 확률이 높아진다고 했다. 하지만 이 방법들은 진작에 써 보았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학기가 끝나고 여름 방학 즈음 같은 무리에서 생리가 없는 아이는 나뿐이었다. 조급해진 나는 생리대를 미리 하고 잤더니 초경을 시작했다는 한 아이의 말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안방에 몰래 들어가 생리대 하나를 꺼내고 안방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하나를 꺼내 누웠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언젠가 표시해 둔 페이지를 펼쳤다. 여류 소설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여주인공의 첫 경험 장면이 두 면에 걸쳐 나온다. [돌처럼 단단한 것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누르고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그 문장을 곱씹으며 한 쪽 손으로 남자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 했다. 생리대가 부스럭 소리를 내고 조용히 회전하고 있던 선풍기 바람은 발가락을 간지럽혔다. 그리고 몇 분 뒤 나는 알았다. 컴퓨터 오락이나 소설을 읽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어른들의 유희를. 그리고 며칠 후, 나는 정말 여자가 되었다.


 

2. 창문에 미끄러지던 손 ‘타이타닉’ ㅡ 모두가 금을 모으던 시절도 있었다. “I am F.”라는 씁쓸한 유행어가 전국에 퍼지던 때였다. 아빠는 매일 출근하던 사무실이 없어졌고 엄마는 급한 대로 집 안의 금붙이들을 모아 팔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아빠는 결국 택시 핸들을 잡았고 엄마는 집이 아닌 곳에서 설거지를 해야 했다. 내 주변은 그렇게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저 디카프리오의 얼굴에 넋을 놓고 있었다. 처음 가 본 극장의 대형 스크린. 그 안에는 어쩌면 내 인생에선 한 번도 경험할 수 없을 화려한 크루즈 여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입김으로 가득한 차 안,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이 사랑을 나누던 장면. 그 절정의 순간 습기 가득한 창문을 치며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오던 손바닥. 어떠한 몸짓 보다 더욱 함축적이었던 그 장면. 디카프리오 팬이었던 친구는 그 장면에서 통곡을 할 정도였다. 극장을 나온 후로 줄곧 그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생각했다. 남자와의 섹스는 어떤 느낌일까? 등굣길 버스 손잡이를 잡은 남학생의 손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두 해 뒤 드디어 그것을 경험했다.


3. 첫 남자는 베이시스트였죠ㅡ 내 나이 열여덟. 그는 밴드부 베이시스트였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첫 경험. 아쉽게도 창문에 스르르 미끄러지는 손바닥처럼 강렬한 장면은 없었다. 우리는 서툴렀고 섹스 후의 관계도 어색해졌다. 베이시스트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여러 남자들을 만났다. 그러다 재미 삼아 쓴 글 하나로 섹스 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였다. “당신이 해 본 최고의 섹스는 무엇인가요?” 이 일을 하고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나는 한결같이 “깊은 사랑과 함께 하는 섹스가 가장 멋진 섹스입니다.”라고 답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 대답이 바로 여자 섹스 칼럼니스트의 한계라고 말했다. 사소한 떨림, 금지된 선을 넘는 스릴,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즐기는 파격. 하지만 이 모든 몸짓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서 더욱 깊어진다는 것임을. 신음을 서로 연기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는 눈빛까지 연출하는 것은 어렵다. 순간의 쾌락 뒤에 오는 허무를 채워 주는 사랑의 눈빛. 그 눈빛을 보고 있으면 이제껏 겪었던 모든 관계는 이 순간을 위한 베이스였다는 것을 내 나이 서른, 한 남자를 만나고 알게 되었다.

 

 

 

SEP.2014/COSMOPOLITAN_내 섹스 라이프의 터닝 포인트(책,영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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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영잡지 HIM] 연재를 시작하며_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0) 2014.01.15

 

 

우리 국군 장병들에게.

 

 

이렇게 위문편지를 써 본 게 정말 얼마만인지요. 그게 아니라, 이렇게 누군가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해 쓰는 편지가 정말 얼마나 오랜만인지요. 초등학교 시절 이 계절에는 "국군 아저씨들께." 라고 시작하는 편지를 제법 자주 쓰곤 했었는데 어느덧 국군아저씨들이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동생들이 되어 있네요. 게다가 이번에는 "섹스 칼럼"과 함께 인사를 하게 되다니! 인생은 정말 놀라워요. 그래서 더 재미있고요.

 

 

안녕하세요. 저는 글 쓰는 여자 김얀 입니다. 그리고 이번 달부터 병영 매거진 HIM에 연재하게 될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은 저에게 특히 의미가 있는 글입니다.

 

 

2년 전이던, 그러니까 제가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문득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니던 직장을 무작정 그만두고 서울로 왔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좋은 글을 쓰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개인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심심한데 그냥 야한 이야기나 한번 해볼까? 해서 글 하나를 썼는데 그 이야기 한 편이 SNS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어느덧 섹스칼럼니스트라는 타이틀을 갖고 여러분들에게 편지까지 쓰게 되었네요.

 

 

사실 저는 섹스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랍니다. 문학을 사랑하고 소설가가 되고 싶어 무슨 글이든 쓰고 싶어 혼자 일기 쓰듯 마구 쓰던 차에 이렇게 섹스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갖게 되어 어리둥절하기도 했어요. 물론 부담이 된 적도 있고요. 특별한 교훈이나 정보가 없는 재미삼아 써 본 한 편의 글로 여러 사람들의 관심과 다양한 매체에서 러브콜을 받게 된 것도 저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구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섹스'란 남녀노소 누구나의 관심사이고 우리 생활의 한 부분인데 이제껏 누구 하나 당당하게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사람이 없었더군요. 사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것인데도 무조건 감춰야 했죠. 특히나 여자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욕구를 감춰야만 정숙한 여자라고 인정받고 사랑받을 수 있었고, 때문에 남자들은 포르노나 돈으로 섹스를 사고파는 데서 조금씩 얻는 왜곡된 정보를 정답으로 알고 있었죠. 기성세대들은 성에 있어서는 "무조건 안 된다"고 말하고 숨기기에 바빴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요즘 애들은 성의식이 땅에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야 말로 음지에선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줬죠. 주변을 둘러보면 편의점만큼 많은 게 러브 모텔이고, 여자가 나오는 노래방, 안마방, 2차야 말로 그들이 만든 거 이상한 성문화 아닌가요?

 

 

저는 어릴때부터 이런 것들이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섹스란 생명을 만드는 일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하지만 지난 밤 섹스를 한 커플 중 단지 '생명을 만들기 위해' 섹스를 하는 커플들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임신이 되면 어쩌지?' 하고 피임을 고민했을 듯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에 대해서 무조건 감추려고만 하지 말고 남, 녀 모두가 밝은 곳에서 이야기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서로 관계를 하는 둘 사이에서만이라도 좀 더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아직 한국에서는 무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분들이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부족함이 많은 제가 여러 사람들의 응원을 받게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관심은 회를 거듭할수록 저에게 글을 쓰는 사람으로써의 책임감을 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의 글을 공감해 주셨고 자신의 경험담과 고민들을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도 그동안 친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개인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습니다. 너무 솔직한 거 아니냐의 친구들의 우려도 있었지만, 결국 저는 이 글 덕분에 더욱 즐거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남녀 관계 아니, 성별을 떠나 인간관계와 인생이란 것에는 정답이 없더군요. 확실한 가치관을 가지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솔직하게 살아 가는 게 정답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너무 뻔한 통계자료를 이야기 하는 것 보다 제가 경험하고, 주변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더 현실적이라 제 이야기들도 가감없이 넣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긴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이 더욱 매력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서른 두 살인 지금까지도 좌충우돌 여기 저기 부딪쳐 상처를 받아가며 어른이 되어 가는 저의 현재 진행형 이야기니까요.

 

 

아,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을 존중합니다. 개인적인 가치관이나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순결을 지키는 사람들, 각자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본인만의 성적 취향, 그리고 돌아보면 후회뿐인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저는 여러분을 존중하고, 이해합니다. 특히나 이제 20대 초반, 저와 다른 성별의 우리 장병들께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읽혀지고 어떤 영향을 줄 수 있게 될 지 개인적으로 기대가 큽니다.

 

 

존경하는 국군 장병 여러분들, 곧 다가올 겨울 단단히 대비하시고 마음속에는 아직 남아있는 봄의 꽃밭을 잘 가꾸시길 바랍니다.

 

 

2013. 10. 사랑을 담아. 김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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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60만 우리 국군 병영 잡지 HIM

[우주 최고 재미진 섹스 칼럼- 채식주의자들의 저녁 식사] 연재 시작

일러스트는 역시, 코베 (@kov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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