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산부인과에서 마지막 치료를 받고 형제유통에 들렀다. 이곳은 마트나 백화점에 납품을 하는 젓갈집이다. 소매가 아닌 도매상이라 대단한 간판도 없고 근사한 진열대도 없다. 그저 유리문에 [젓갈 팝니다]라는 흘려 쓴 글씨가 있을 뿐이다. 그 문을 열면 인테리어는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바닥에 대형 냉장고가 있고 그 안에 명란젓, 굴젓 같은 10여 가지 젓갈이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이 집의 낙지젓을 제일 좋아한다. 대형 마트 3배 크기의 용기에 담긴 맛있는 이 낙지젓은 단돈 8000원. 이 한통만 있으면 보름 정도는 반찬 걱정이 없다. 참, 대신 신용카드는 안 받는다. 평소 지갑없이 신용카드 한장만 달랑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나도 그래서 몇 번 발걸음을 돌렸던 적이 있다. 오늘은 다행히 주머니에 만원짜리가 있어 기쁜 마음으로 그놈을 사고 까만 봉지에 넣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행복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나오면서 이제 사당동을 떠나면 이것들과 다 안녕이겠다싶어 불쑥 마음이 흔들렸다.

 

 늘 야외 스피커로 라디오를 틀어 놓아 나의 집중력을 떨어뜨리던 집 앞 치킨 파티. 맛이나 가격을 따져봐도 그집엔 왜 늘 그렇게 손님이 많은건지는 아무리봐도 모르겠다. 그에 비해 늘 묵묵히 점포 앞 커다란 가마솥에 건강한 소뼈를 삶고 있는 맞은편 소머리 국밥집은 왜 늘 조용한 걸까? 과일 좋아하는 나만 보면 표정이 밝아지는 행복마트 목청 좋은 청과물 아저씨도 이곳을 떠나면 안녕이다. 꼬깃꼬깃한 배추잎 33장을 건네며 "꼭 작가가 될 수 있게 기도하면서 만들어달라"던 내 말을 농으로 듣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시던 행복한 나무 세상 사장님. 그 책상에 앉아 글을 쓴 덕분인지 부족해도 작가 그 비슷한 타이틀로 살아가고 있다. 일요일 밤이면 늘 편의점 골목에 트럭을 대고 장사를 하는 새우 튀김 아저씨. 정해진 날 없이 운이 좋아야 만날 수 있는 10번 출구 앞 한치 아저씨도 이곳을 떠나면 모두 못 볼 얼굴들이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낮과 밤, 안과 밖할 것 없이 소란스러웠던 우리 집. 여자 나이 서른이면 시집 가서 아파트 사는 게 정답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서른엔 삐뚜름한 방 2칸 좁은 거실에서 여자 셋이 모여 살았다. 남들 시선도 상관 없고, 무서운 것도 없던 그때. 좁고 불편한 터에서 많이 웃고 떠들었다. 나라의 제를 모시는 큰 사당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마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된 사당동. 사람들이 모이고, 타악하며 굿을 하던 곳이라서 그런지 이 동네는 아직도 골목 곳곳에 작은 극단이나 합주실이 제법 있다. 당장 우리 집의 양 옆으로 연기 연습실과 기타학원이 있다. 물론 이것들 역시 내 창밖 소음에 일조한다.

 

 

 이곳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세 명이 모여 사는 집은 항상 분주했고, 그 좁은 공간에 또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내 침대에서 잠을 잤던 몇명의 남자들도 있었다. 그 중 한 남자와 오래 사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 글을 쓰겠다고 서울로 와서 영등포에 혼자 방을 잡았을 땐 아무것도 쓰지 못해 누웠던 날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작두 위의 무녀처럼 자판을 두드렸다. 이건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서른이 되도록 뭔가에 그렇게 뭔가에 집중하며 열심이었던 적이 없었다. 물론 나를 이곳으로 불러 준 룸메이트 수련의 응원과 도움의 힘이 컸다. 벌써 3년 전의 일이다. 

 

 서울에선 그 사람이 사는 동네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낮과 밤도 없이 마시고 떠드는 사람들. 맛집 골목을 끝으로 이어지는 재래 시장 때문에도 이곳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다. 1년 365일 소란하고 복잡하고 불안정한 이 환경과 나는 닮아 있었다. 교통의 요지답게 이 사람, 저 사람이 다녀갔다. 그것은 편리할 때도 있었고 때론 나를 괴롭게 했다. 싸고 푸짐한 맛집 골목답게 결국 이곳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밥벌이는 했다. 창문을 뚫고 파고드는 고질적인 거리의 소음은 적당한 스트레스가 되어 주었다.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이 동네는 내 본질과 딱 맞았다.

 

 어느 더운 여름날 애인이 했던 말이 기억 난다.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만족스러운 섹스를 끝내고 나란히 누웠을 때다. 발 아래로 미지근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애인은 이곳이 태국의 게스트하우스같다 말했다. 나 역시 이곳이 뒤라스의 소설 '연인' 중 콜랑의 독신자 방같단 생각을 자주 했다. 어린 백인 소녀와 허약한 중국인 갑부가 창밖의 소음과 함께 몸을 섞던 덥고 어두운 방. 주말 밤이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소음때문에 결국 우리가 더 큰 소리를 내며 섹스를 한 적도 있었다. 최승자의 시를 서로에게 읽어주던 밤도 있었다. 겨울에 함께 껴안고 있으면 전기장판이 없어도 따뜻했다. 물론 서로를 저주하며 크게 싸웠던 날도 있었다. 그 사람을 잊기 위해 사랑한 만큼 증오를 하던 밤도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여행자처럼 용감했고, 소설 속 연인처럼 깊었다.

 

 사당동을 떠난다면 이곳에서 겪었던 모든 것들은 지난 밤 꿈처럼 희미해지겠지만, 끝내 떨칠 수 없는 것들은 이미 깊이 각인 되어 있다. 놓치기 싫어 떠오르는 대로 급히 노트에 적어 남겨 둔 것도 있다. 물론 그것들은 내가 어느 곳으로 가든 함께 미래를 나눌 것이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확실한 계획은 아직 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사당동을 떠난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대로 곧 어디론가 거처를 옮길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내가 그러했듯 그에따라 나는 조금씩 변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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