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너는 나를 정말 좋아해?"


섹스를 마치고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응"


남자는 침대에 앉은 채로 조심스레 콘돔을 빼며 말했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있던 물티슈를 집어 남자에게 주며 다시 물었다.


"그럼 나를 왜 좋아해?"


남자는 그제서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천장을 보고 누웠다. 그러다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글쎄. 왜 어째서 좋아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란 힘들지. 뭐 이를테면 애정이나 사랑은 이성적인 판단에서 내려진 결과물이 아니니까."


나는 남자의 팔을 댕겨 베고는 나란히 누웠다.


"그래. 당연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 하지만 뭐든 일에 이유가 없는 일은 없는거야. 사랑이 감성적인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감성적으로 표현을 해봐. 네가 왜 나를 사랑하는지."

 

그러자 남자는 미간의 인상을 찌푸리며 내 쪽으로 돌아 누웠다.


"아니, 여자들은 꼭 그러더라. 그럼 너는 나를 왜 좋아하고 사랑해? 감성적으로든 이성적으로든 내가 이해할 수 있게끔 니가 먼저 얘기해 봐."


나는 한손으론 남자의 가슴께에 손가락으로 아무렇게나 원을 그리면서 말했다.


"너 여자들한테 별로 인기 없었지? 여자들은 이성보단 감성이지. 내가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무슨 이해가 필요한 말이 아니야. 하루키 소설이 왜 여자한테 인기 있는 줄 알아? 내가 얼마나 좋아? 라고 묻는 여자한테 봄날의 곰만큼 좋다고 말을 하잖아. 봄날의 곰만큼이 어느 정도냐면 봄날의 들판을 여자가 걷고 있을때 갑자기 벨벳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와선 인사하고 그런 다음 새끼곰을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거라고 말해주는거야. 뭔가 뜬구름 잡는 소리 같기도 하겠지만, 원래 여자들은 뜬구름 잡는 소릴 듣고 싶어하는 거야. 특히나 이렇게 남자랑 섹스하고 누워있을 때엔."

 

그러자 남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반색하고는 나에게 묻는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 현실 속의 곰은 너네가 생각하는 그런 곰돌이 푸가 아니야. 아무리 새끼곰이라도 그렇지 곰이랑 언덕을 굴러봐라. 최소 전치 3주겠다."


남자는 뭔가가 불만인지 입을 삐죽대며 지지않고 말한다. 그 모습이 곰돌이 푸 동화책에 빠져있는 여섯살 꼬마같아서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럼 내가 말해주지. 내가 널 왜 사랑하는 지를"


나는 일부러 더욱 확신에 찬 눈빛을 보여주기 위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를 봤다. 
남자는 호기심이 이는 눈빛으로 대답을 기다린다.


"사실 섹스는 약간의 호감가는 상대와 호기심만 있으면 누구와도 재밌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면 이렇게 섹스가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는거야. 그래서 잠든 것을 확인하고 먼저 나와 버리거나, 불편한 팔베개를 하고 남자가 잘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른 벽에 붙어 잠을 자는거지. 그런데 이상하게 너는 처음부터 같이 잠을 자는 게 편했어. 신기한 일이지? 이렇게 나란히 누워있으면 나도 모르게 니 팔을 당겨와서 머리를 베고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싶어지는거야. 겨드랑이에 살짝 베인 땀 냄새에도 상관없이 이렇게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한쪽 다리가 니 허벅지 위로 올라가. 사실 나는 어릴 때 쓰던 내 길다란 쿠션 외에는 그렇게 편한 마음으로 무엇에 다리를 올려본 적이 없어. 혼자 자는 게 습관이 됐기 때문에 사람한테는 특히 더 불편했지. 그런데 네 허벅지에 다리는 올리고 나면 한 쪽팔은 또 니 가슴 위로 올려버리게 되는거야. 아마 천장 형광등에 반짝이는 눈이 있어서 내 모습을 본다면 아주아주 웃길 수도 있어. 하지만 니 옆에만 누우면 내 몸은 뭔가 이런 자세가 입력된 것처럼 자동으로 만들어져 버리는거야. 그런 다음 나는 아주아주 단잠. 심지어 어제는 어릴 때처럼 잠자리랑 하늘도 날아다녔어. 잠은 죽음의 사촌이라고 누가 그랬대. 그치만 이런 잠이라면 죽음도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내 말을 듣던 남자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옆으로 돌아누으며 말했다.


"음. 뭐 대충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럼 뭐 내가 뭐 쿠션이라는 거야 뭐야?"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건 아닌 눈치다. 나는 남자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남자의 머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응. 맞아. 너는 쿠션같아. 내가 어릴 때 늘 기대자던 길다란 쿠션이 있었는데, 그 쿠션 같아. 그래서 니가 좋아."


남자는 숨이 막힌다며 고개를 부볐다. 


우리는 웃으며 다시 나란히 누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쿠션을 안았다. 누가 공기 속에 수면제라도 탄 걸까? 나는 다시 남자를 안고 단잠에 빠진다. 오늘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면 내일 아침 정말 키가 조금 더 커져 있을지 모르겠다.

 

 



           Istyle24의 패션웹진 sn@pp  - 김얀의 色콤달콤한 연애 www.snapp.co.kr

 

 뒷 이야기 ㅡ snapp은 패션웹진이라 보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20-30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자라서 그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쓴다는 게 엄청 부담이었다. (나이대는 나와 같지만 나는 패션이나 유행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연애칼럼이라고 해도 스스로 나의 연애 방식을 추천해줄만 하지도 않다.) 그래서 1회 때는 내 경험으로 재밌고, 쉽게! 라는 컨셉을 잡고 글을 썼는데, 그러고 나니 쓰는 게 재미가 없다. 내가 원하는 글쓰기가 아니었다. 글을 올려놓고 처음으로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3회 때 부터는 그냥 내가 쓰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쓰자!하고 컨셉을 잡았다. 그러고 나니 금새 글쓰기가 재밌다.(요즘에는 snapp에 쓰는 연애칼럼이 제일 재밌다.) 게다가 매회 별 다른 생각없이 썼는데, 이것들을 모으면 연애 소설이 나올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나는 일이다!)

 

그리고 한겨레hook 칼럼도 마찬가지지만, 보통 글을 완성해서 일러스트를 하는 친구들에게 보내면 그들이 내 글에 맞게 그림을 그려준다. 그런데 최근에 snapp의 글들은 알디(@RDRDRDRDRDRDRD)의 그림을 먼저 받아서 그것을 보고 내가 상상해서 글을 만드는데, 이것도 매우 즐겁다. 한겨레hook의 일러스트레이터 코베(@kovelee)에게도 이 방법으로 해보자고 해야겠다. 

 

 처음 여기저기서 칼럼을 써 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는 그저 기쁘기만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것때문에 정작 내가 진짜 쓰고 싶어하는 글을 쓰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후회했던 적도 있다. 마감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어디가서 놀아도 노는 게 아니었던 적도 있었다. 쓰기 싫어서 울면서 키보드 앞에 앉았던 적도 있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이렇게 간사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디서 글쓰기를 배운 적도 없고 그다지 잘 쓴다고 말 할 수도 없는 사람이 이런 기회를 받았다는 것부터가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게으름 때문에 마감이라는 약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매일 잠만 잤을테다. 스스로도 남들보다 조금은 특별한 감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그것을 글로 매끄럽게 표현해 내는 것은 많이 공부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부와 노력이라는 단어는 재미없지만 이것은 나의 잘난척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나는 사실 잘난척을 하는 것을 매우 즐긴다.)

 

 어쨌든 돈을 받으며 스스로 공부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내 평생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장학금을 받는 기분이 든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해. 

 

 근데 다음 주에는 또 뭘 어떻게 쓰지?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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