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의 자유가 부럽다고 했지만, 뭔가를 쓴다는 핑계로 온 종일 좁은 방 천장을 보고 누워 너를 기다리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였던 나는, 너의 그 바쁜 하루가 부러웠다.



 종일 쉬지 않고 울리던 너의 전화기와, 여보세요 대신 직함과 이름을 말하던 너의 딱딱한 목소리. 내일 스케줄을 알 수도 없고, 시도 때도 없이 이어지는 지방 출장.



 처음부터 두꺼운 패딩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던 너의 모습 때문일까? 한국에 돌아와 너를 옆에 두고 누운 지금도 TV에서나 볼 수 있는 너의 일터와 그 속에서 단정한 정장을 입은 너의 모습을 나는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파리에서의 3일 째, 생각했던 것 보다 폭이 좁았던, 갈색에 가까운 물빛의 쎄느강 어느 다리 위에서 너를 처음 만났다.

 



 "저기, 한국 사람이시죠?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세요. "



  네가 입고 있던 노스페이스 점퍼 때문이 아니더라도 왠지 네가 한국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너는 그때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보며 긴 렌즈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있었는데, 갑작스러운 나의 부탁에 당황 한 표정을 보이면서 내가 건넨 카메라를 받아들고 몇 걸음 물러서서 내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 한번 확인해 보세요. "



 라며 카메라를 건네던 너는, 순간 삐죽 내민 내 입술을 언제 본 건지 살짝 웃으며 다시 찍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다시 웃으며 카메라를 건넸다. 아까 보다 뒤로 몇 발짝 더 물러섰다가 셔터를 몇 번 누르더니, 다시 앉아서도 몇 번 누른다. 그리고는 가까이 다가오면서 갑자기 또 한 번 찰칵. 그리고는 당당하게 카메라를 내밀던 너. 나는 괜히 민망한 마음이 들어서 카메라를 받아들고는 주절주절 말을 했다.



 "아니, 솔직히 배경 사진이야 요즘 인터넷 검색만 하면 작가들이 멋있게 찍어놓은 것 많잖아요. 그게 굳이 뭐가 중요해요? 저는 제 사진이 제일 중요해요. 혼자 하는 여행은 너무 좋은데, 이렇게 사진 찍을 때가 불편하단 말이야. 특히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는 민망해."

 

 몇 장을 확인해 보니,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다. 사실 사진 포커스는 별반 다를게 없었는데, 내 표정이 좀 더 자연스러워져 있었다.



 "근데 제가 한국 사람인 줄 어떻게 알았어요? "



 카메라의 모니터를 확인하고 있던 내 앞에 서서 네가 물었다.



 "여행하는 동안 느낀 건데, 노스페이스 점퍼 입고, 제일 좋은 카메라 들고 있는 남자는 무조건 한국 남자예요. 그리고 몇 몇이 뭉쳐 다니면서 썬 그라스에 루이비통 가방 든 여자는 중국 아니면 한국여자. "



 내심 진지한 내 표정 때문인지 너는 크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런 것도 같다며......



 "어디 봐요, 나도 그 쪽 사진 한 장 찍어 줄게요. "

 

 그러자 너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목에 매고 있던 카메라를 나에게 건넸다. 제법 무겁다. 렌즈를 돌려 조절하면서 오른쪽에는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담고, 왼 쪽 끝에는 천천히 지나가는 배의 꼬리가 조금 보일 때 찰칵.



 셔터를 누르는 순간 이제는 흘러가는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친절한 카메라의 셔터 음. 둘이 같이 서서 카메라 액정을 확인하니, 겨울 정오의 과하지 않은 햇살을 받은 몇 분전의 네가 활짝 웃고 있었다.


 

 


 

 "우와, 사진 잘 찍으시네. 이거 완전 베스트 컷이다. 안 그래도 혼자 다니느라 제대로 된 사진이 없어서 오늘 그냥 이대로 돌아가나 싶었는데, 고마워요."



 "아, 오늘 돌아가시나 봐요? 어느 나라로?"



 "아, 그게 오늘 밤 비행기로 한국가요. 그리고는 하루 쉬고 바로 출근. 갑자기 취직이 되는 바람에 급하게 표 끊어서 와서 아직 정신이 없네요."



 2 주 동안 영국을 시작으로 이태리와 스페인을 갔다가 마지막으로 파리에 왔다던 너는, 촉박한 시간 탓에 나라별로 하루는 일일 시티투어를 하고, 둘째 날은 좀 더 여유를 두고 그 중 좋았던 곳을 천천히 돌아보았다고 했다. 오늘은 몽마르뜨와 밤의 에펠탑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눈에 담고 공항으로 간다던 너. 그에 반해 특별한 계획도 일정도 없이 파리에 온 3일 동안 아직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못 봤다는 내 얘기에 너는 조금 놀란 듯 했다.



 "그럼 몽마르뜨 언덕은요?"



네가 물었다.



"안 갔어요."



내가 대답했다.



"그럼 루브르는요?"



네가 다시 물었다.



"아니요."



내가 다시 답했다.



"개선문, 샹젤리제, 베르사유?"



"아니. 아니. 아니."



 너는 고개를 갸우뚱 하며 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 그럼 이틀 동안 대체 뭘 했어요? 그럼 파리엔 왜 온 거예요?"



 글쎄, 그러고 보니 나는 정말 이틀 동안 뭘 했던 걸까? 그리고 왜 파리에 온 걸까?



  "그냥, 독일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에 무작정 파리로 온 거였어요. 사실 이번 여행에서 프랑스는 빠져있었는데, 독일에서 마지막 날 갑자기 파리에 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뭐 굳이 여기저기에 가지 않아도 파리는 파리 그 자체잖아요. 그냥 여기가 파리잖아요. 파리의 공기, 파리의 사람들, 그리고 쎄느 강 이라면 이틀 동안 충분히 봤어요. 이제 오늘 반짝이는 에펠탑만 보면 충분해요. "



 그때 너는 대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손목의 검은 전자시계를 한 번 보고는 불쑥 같이 몽마르뜨로 가자고 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와서 몽마르뜨 언덕도 안 보고 간다는 건 말이 안 된다며, 잘 찍어 준 사진에 대한 보답으로 일일 가이드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갑자기 뭔가 대단한 결심에 찬 표정으로 말하는 너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났다.




 



 

  지하철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을 때 하늘은 조금씩 흐려지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빗방울을 쏟아낼 듯이 잔뜩 부푼 먹구름. 귓가로 스쳐 불어오는 바람도 전 보다 조금 더 차가워져 있다. 주머니 속에 있던 장갑을 꺼내 끼고 천천히 오르막을 오르니, 과연 이것이 보들레르의 시처럼 파리의 우울이구나 싶다.



 커다란 배낭을 메고도 지치지 않고 언덕을 오르며 몽마르뜨에 대해서 설명해 주던 너. 파리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라고도 했고, 많은 예술가들이 살던 곳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럼 뭘해요. 지금은 그냥 과거의 영광을 등에 업고, 그저 관광객들한테 그림이나 팔아먹는 동넨데......"



 나의 말에 너는 조금 당황한 듯 했다.



 "그. 그래도 그 뭐냐. 고흐도 여기 살았었고.... 또.. 그 누구라고 했지? 아, 어제 분명 들었는데...... "



 "환락가였기도 했죠. 뭐 지금으로 말하자면 집창촌정도 되려나? "



 집창촌이라는 나의 말에 너는 자리에 멈춰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나쁜 뜻이 아니라. 고흐도 그렇고 보들레르도 그렇고 다 창녀랑 연애 했잖아요. 우리 나라 예술 쪽도 마찬가지야. 이상의 금홍이도 백석의 자야도 다 기생이고 창녀들이었잖아요, 그러고보면 창녀들이 예술에 끼친 영향이 엄청나." 



 너는 초면의 남자에게 창녀라는 말을 서스럼없이 하는 내가 놀라운 건지,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왜요? 이건 역사적인 사실이라구요."



 너는 갑자기 한숨과도 같은 실웃음을 뱉더니, 어서 올라가지고 재촉했다. 네 발걸음을 따라 한걸음씩 걸으니 그제서야 초면에 내가 좀 심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을 양 옆에둔 좁은 오르막길을 올라, 가파른 계단을 오른다. 계단 옆의 벽은 그래피티로 칠해져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는데 갑자기 네가 손을 내민다. 아무래도 계단을 오르는 내 모습이 불안했나 보다. 손 대신에 한 쪽 팔을 조심스레 잡고 마지막 계단을 오르니, 작은 광장이 보인다. 곳곳에 이젤을 편 화가들이 보인다. 어떤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려준다며 호객 행위를 하기도 했다.







  
 

 

 나는 어느 이름 없는 길거리 화가의 에펠탑 그림 앞에서 너에게 말했다.



 "예전에 친구가 배낭여행으로 파리에 왔었는데, 몽마르뜨를 보고 엄청 실망 했었대. 상상 속엔 아주 로맨틱한 언덕이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관광객들이랑 관광객 초상화 그려주는 사람들만 바글바글. 그냥 우리나라 어린이 대공원 같은 느낌이었대. "



 그 말에 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 쪽으로 가면 파리 시내 전경이 보인다고 했다. 우리는 다시 걷는다. 이제는 내리막길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회색빛 하늘 아래로 회색빛 파리 전경이 펼쳐졌다. 같은 유럽이지만 프라하와 독일에서 보던 전경과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계단에 앉아 몇 분 동안 서로 말 없이 파리 시내를 구경했다. 먼저 말문을 연건 나였다.



 "근데, 여자를 사 본 적 있어요?"



 옆에 앉은 너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이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없음 말구요."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나를 보고 얘기 했다.



 "그런 얘기 전에 먼저 이름부터 물어 보는 게 순서 아닌가요?"

 

 아, 그런가? 나는 조금 민망해져서 살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내 이름. 너도 따라 웃으며 이름과 나이를 말했다. 나보다 2살이 어린 스물여덟. 그리고 이제껏 준비해오던 시험에 합격해서 다음 주부터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말도 했다.



 청와대? 내가 사는 나라에 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 그 안에는 정말 사람이 살고 있을까? 그 곳에서 잠을 자고, 세수를 하고 진짜 밥을 먹을까? 순간 청와대라는 곳이 이 곳 몽마르뜨 보다 더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너는 나에게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작가라고 말을 해 버렸다. 너는 조금 놀란 눈으로 어떤 책을 쓰냐고 물었고, 서점에 가면 내 책을 볼 수도 있냐고 했다. 나는 그냥 유명하지 않은 여행 작가라고 얼버무렸다. 그러자 너는 어쨌든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이 제일 부럽다는 말과 작가라고 하니 왠지 뭔가 달라 보인다고도 했던 것 같다.



 물론 나는 여행 작가이기는커녕 이번 여행에는 노트 한 권 가져오지 않은 다른 여행객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다. 뒤 늦게 왜 괜한 거짓말을 했을까 싶기도 했다. 그냥 솔직히 모든 게 지겨워져서 별 다른 계획도 없이 배낭을 메고 온 거라고, 사실 이제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했더라면 조금 더 편했을 것을.



  

 


 

 무심히 눈앞에 펼쳐진 파리 시내의 전경을 보던 중, 너는 힐끗 손목의 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이제 그만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지금쯤 내려가서 에펠탑 근처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먹고 오후 6시 정각 처음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자고 했다. 어제 파리 일일투어 가이드에게 에펠탑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를 전수 받았으니,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했다. 뭐든 대충 대충인 나와는 다르게 시간을 계산해가며 계획을 짜는 모습과 믿고 따라오라는 너의 말이 신선했다.



 다시 처음 우리가 만났던 장소로 돌아가기 위해 탄 지하철은 아까 보다는 조금 더 붐볐다. 우리는 출입문 쪽에 기대서 나란히 서 있었다. 별다른 얘기 없이 서로 멀뚱히 지하철 안에 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5분 쯤 흘렀을까, 어느 역에서 기타를 맨 중년의 흑인 남자가 탔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전차가 출발할 때, 그 남자는 우리 바로 앞에 서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것 같은 노래였는데, 능숙하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모습에 빠져 있다 보니, 허름한 옷차림이 보인 건 나중이었다.



 지하철 안의 승객들도 미소를 짓고 노래 하나가 끝나자 모두가 박수를 친다. 노래를 마친 남자가 작은 종이 박스를 들고 승객들 사이를 지나치니, 여기저기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어주고 박스에 동전을 채워준다. 우리도 동시에 마주보고는 웃으며 주머니 속의 동전을 찾았다.



 순간 서울의 지하철이 생각났다. 비좁은 틈 사이로 찬송가 카세트를 목에 걸고 구걸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사람들의 피곤한 눈. 강력본드나 대일밴드를 검은 가방에 넣고 파는 사람들과 그들을 보는 무심한 시선들. 그런데 파리에서는 지하철 안에서도 예술을 파는구나. 과연 여기가 파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하철에서 내리니, 어느새 해는 서쪽 끝으로 조심스레 내려앉았다. 유럽의 겨울은 오후 4시만 넘어서도 이렇게 차분하게 어두워졌다. 너의 발걸음을 따라 가만히 걷고 있으니, 몇 시간 전에 만난 사이인데도 부쩍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비포 썬라이즈라는 영화 알아?"



 내가 물었다.



 "아니."



 네가 답했다.


"레오 까락스는?"


내가 다시 물었다.



"그건 뭐지?"



네가 나에게 되물었다.
 


 두리번거리며 식당을 찾고 있던 너. 하긴, 지금 중요한 건 일단 배고픔을 달랠만한 싸고 훌륭한 식당을 찾는 것. 제법 오래 걷다가 어느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나는 연어 샐러드와 탄산수를 시켰고, 너는 치킨 샌드위치와 콜라를 시켰다. 별다른 말도 없이 식사를 끝내고 굳이 네가 내겠다는 걸, 겨우 각자 계산하는 걸로 합의를 했고 우리는 다시 에펠 타워 방향으로 걸어간다. 정확하게 기억나는 건 그때가 오후 6시의 20분 전이었다는 것. 아까보다 조금 더 빨라진 너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자, 이제 여기서부턴 눈을 감아야 돼."



 너는 불쑥 내 뒤로 와서 양 어깨에 손을 올리곤 천천히 나를 앞으로 걷게 했다.



 "자, 몇 발자국만 걸으면 됩니다. 눈은 절대 뜨지 마요. 눈 뜨면 누나만 손해니깐."



 어찌된 게 처음 보는 나보다 네가 더 떨리는 듯 했다. 나는 알겠다며, 눈을 꼭 감고 있었다. 너는 뒤에서 계속 말을 걸어온다.



 "파리에 갔다 온 사람들이 다들 이렇게 말하더라. 이 반짝 거리는 에펠탑 한번 보면 자려고 눈 감을 때 마다 이 에펠탑이 자꾸 눈앞에 나타난다고...... 근데 진짜 나도 어제 그랬다니까. "



 나 역시 친구들에게 그런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과연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은 어떨까? 그때 너는 뒤에서 조그맣게 숫자를 센다. 자, 5, 4, 3, 2, 1 그리고 내 옆으로 와서 손가락으로 에펠탑 가르쳤다.



 순간,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낮은 환호성과 박수소리들. 전체가 은은하게 붉게 물든 에펠탑 위로 수 만개의 불꽃이 반짝인다. 거대한 철근 구조물은 저 반짝이는 옷 때문에 순간 파리 전체를 동화 속의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신기하게도 저 눈부신 반짝거림에 맞춰 나의 심장도 같이 빨라졌다.



 "어때? 진짜 예쁘죠?"



 너는 처음 손님을 데리고 온 초보 가이드처럼 약간의 긴장감을 띈 얼굴로 물었다.



 "응. 진짜 너무 예쁘다."



 어떻게 표현을 할 방법이 없었다. 정말 너무 예뻤으니. 둘 다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별다른 말없이 반짝이는 밤의 에펠탑을 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손목의 시계를 확인하던 너는, 이제 공항으로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사실 조금 늦었다며. 나는 약간의 미안한 표정으로 오늘 하루 고마웠다고 말하고 나도 내일은 다시 런던을 거쳐 며칠 뒤엔 한국으로 간다고 말했다.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너는 점퍼 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서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를 적어주었다.



 "한국에 오면, 밥 사줘요. 세상에 공짜란 없다는 거 누나도 알죠?"



 그렇게 말하고 손을 흔들며 사라지던 너. 나도 따라 손을 흔들었다. 점처럼 작아지던 네 뒷모습에도 에펠탑은 그 자리에서 아까와 다르지 않게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주위의 다른 관광객들 틈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게스트하우스로 갔고, 뒷날 아침 런던 행 유로라인 2층 버스에서 다시 지겨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런던 친구 집에서 며칠을 보낸 뒤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돌아와 시차적응으로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던 중, 문득 네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어보았다. 긴 신호음 끝에 들리는 너의 잔뜩 긴장한 너의 목소리. 내가 누구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네가 먼저 지금 근무 중이라 내일 전화하겠다는 말을 하고 끊었다. 아, 그렇지. 너는 이제 일을 시작한댔지.



 그리고 뒷날 오전 근무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이라는 전화가 왔고, 우리는 그 며칠 뒤 명동에서 만났다. 명동은 너의 직장과 나의 집의 중간이었다. 유명하다는 칼국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에펠타워를 이야기하며 웃다가 우리는 결국 같은 택시를 타고 신촌의 어느 모텔 앞에서 내렸다. 마치, 처음 만나 서로 사진을 찍어주다 함께 몽마르뜨로 가는 지하철을 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뒷날 아침 눈을 떠보니, 새벽 일찍 바로 출근한다는 너의 쪽지가 모텔 전화기 옆에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순간, 괜히 만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평생 못 잊을 파리에서의 추억으로 남겨둘 걸 그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며칠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너의 문자 메시지를 몇 개 무시했었는데, 결국 며칠 뒤 나는 또 명동의 어느 칼국수 집에서 너와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신촌으로, 모텔로, 너는 다시 이른 새벽 출근을 하고 나는 혼자 침대에 멀뚱히 누워 있다가 느즈막이 혼자 모텔을 빠져나왔다.



 그런 만남을 몇 번째 반복했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애인이라고 부르는 사이가 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처음처럼 여행자들도 아니었다. 이제는 뭔가 정리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너는 항상 바쁘고 피곤했다. 나 역시 너에겐 늘 뭔가를 열심히 쓰는 중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내가 뭘 해서 먹고 살아야 할 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야간 근무와 곧 있을 행사 준비를 끝내고 정오가 가까운 시간에 네가 집으로 찾아 왔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터라 너를 침대에 앉혀두고는 급하게 화장을 했다. 침대에 앉아 의미 없이 리모컨의 버튼을 누르고 있던 너는 오늘도 역시나 피곤해 보였다. 먼저 침대에 누운 네 옆에 나도 살짝 누웠다. 오늘은 이렇게 누워 밤이 될 때까지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처음에 만나 밤의 에펠탑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침대 옆의 큰 창으로 엷은 보라색 커튼을 가볍게 뚫은 겨울 정오의 햇살이 거침없이 새어 나온다. 너는 역시나 별 다른 말이 없고 건조한 입술로 다가온다. 한 낮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모든걸 숨김없이 내 보인다. 미간에 인상을 쓰고 내 위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너. 목 아래로 작은 점 두 개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탄탄한 가슴 근육과 옅은 커피색의 유두. 그리고 그 아래 조용히 숨어있던 배꼽과 그 옆에 난 작은 상처도 보인다.



 거친 숨소리와 신음과 순간의 떨림이 엉킨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나란히 누웠다. 나는 가만히 앉아 너를 봤다. 한 낮의 해가 비춘 너의 적나라한 몸과 얼굴을. 너 역시 내 모든 걸 보았을까? 옅은 잠에 빠져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하는 너의 가슴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순간 너의 마음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커튼을 활짝 열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한 빛이 들어온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보며 차라리 네 연락처를 파리 길거리 어디에서 잃어버렸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잠든 네 곁에 나도 따라 누웠다. 눈을 감고 우리가 함께 보았던 반짝이던 밤의 에펠탑을 떠올려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발밑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덥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반짝이던 에펠탑과 차가운 밤공기와 너의 얼굴을 떠올려보려 노력했지만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제는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aris. 1월 23일, 밤의 에펠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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